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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한 모금]타인을 헤아리는 일은 왜 언제나 어려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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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그 자체로 책 전체 내용을 함축하는 문장이 있는가 하면, 단숨에 독자의 마음에 가닿아 책과의 접점을 만드는 문장이 있습니다. 책에서 그런 유의미한 문장을 발췌해 소개합니다.

부모의 재혼으로 잠시 형제로 지냈지만 마음을 나누지 못하고 영영 남이 되어버린 기하와 재하. 두 사람이 과거와 현재를 아우르며 들려주는 이야기가 씨실과 날실처럼 교차되며 이어지는 이 소설은 뜻대로 되지 않는 관계와 좀처럼 따라주지 않는 마음을 경험한 모두에게 따스하면서도 묵직한 위로로 다가선다. 왜 타인을 헤아리고 받아들이는 일은 언제나 낯설고 어렵기만 한지, 이제는 함께할 수 없는 인연과 슬픔도 후회도 없이 작별할 수 있는지, 실패한 이해와 닿지 못한 진심은 어떻게 의미 없이 사라지지 않고 희미하게나마 빛나는 기억으로 남게 되는지 한층 깊어진 응시와 서정으로 풀어냈다.

[책 한 모금]타인을 헤아리는 일은 왜 언제나 어려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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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하 어머니는 내가 저기요, 하고 불러도 못마땅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어머니라고 부르길 강요하지도 않았다. 가타부타 없이, 그저 속없는 사람처럼 그러마고 할 뿐이었다.

그래서였을까. 내게 재하 어머니는 객(客) 같았다. 언제든 떠날 수 있고, 언젠가는 떠날 사람. 그렇게 생각한 탓인지 시간이 지나서도 그녀에게 뭘 부탁하거나 전하는 게 영 어렵기만 했다.(12~13면)


검진이 있는 날이면 재하는 평소보다 더 말이 많아졌고 더 크게 웃었다. 겁이 나는 걸 감추려 안간힘 쓰는 게 빤히 보였다. 내가 모르는 재하의 표정. 그런 것이 언뜻 비칠 때마다 그애를 향한 묵은 오해나 염오가 한층 누그러졌다. 면을 건져 먹는 재하를 보며 저 애가 내 친동생이라면 어땠을까, 잠시 가정해보기도 했다. 투박하고 거침없이 속엣말을 쏟아내며 보다 친밀해질 수 있었다면. 서로에게 시큰둥하다가도 어느 순간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끈끈한 우애 같은 것을 우리가 처음부터 나눌 수 있었다면.(26면)

비정에는 금세 익숙해졌지만, 다정에는 좀체 그럴 수 없었습니다. 홀연히 나타났다가 손을 대면 스러지는 신기루처럼 한순간에 증발해버릴까, 멀어져버릴까 언제나 주춤. 가까이 다가설 수 없었습니다.

가감 없이 표현하고 바닥을 내보이는 것도 어떤 관계에서는 가능하고, 어떤 관계에서는 불가하다는 사실을 저는 알고 태어난 것일까요.(58면)


재하는 피로해 보였다. 그애의 충혈된 눈과 거무스름한 눈가를 훑어보았다. 홍반이 사라진 것을 빼면 얼굴은 어릴 때와 비슷했지만, 하는 말이나 행동은 영 다른 사람 같았다. 의식적으로 존대를 하는 것부터 그랬다. 반말이 나오면 그애는 재빠르게 말을 고치며 예의를 차렸다. 그럴 때마다 왕래하지도, 안부를 묻지도 못한 지난 시간들이 절감되었다.(102면)


두고 온 여름 | 성해나 지음 | 창비 | 172쪽 | 1만4000원




서믿음 기자 faith@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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