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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대열의 體讀] 슬쩍한 '4경원' 숨긴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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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산 딸깍발이] 머니랜드 서평
부패한 은닉자금, 어떻게 만들어지고 어디로 흘러가는가
가진자만이 드나들 수 있는 요지경 가상세계 '머니랜드'

케이맨 제도 조지타운의 모습.
(케이맨제도 정부 홈페이지 http://www.caymanislands.ky)

케이맨 제도 조지타운의 모습. (케이맨제도 정부 홈페이지 http://www.caymanislands.k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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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최대열 기자] 과거 권위주의 시대, 정치적 투명성이 떨어지는 독재국가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권력자의 재산 빼돌리기가 다시 세간의 관심을 끌게 된 건 국정농단 사태 탓이 컸다. 여론은 들끓었다. 물론 감시망이 덜한 해외에 자산을 모아두는 건 그보다 오래전부터 많이 자행돼왔다. 1964년 12월 한 신문의 1면에는 삼성 창업자 이병철이 1000만~2000만달러를 해외에 빼돌린 증거가 있다는 당시 어느 국회의원의 법정 진술이 보도됐다.


국제통화기금(IMF) 사태로 많은 기업이 쓰러질 때도 망한 기업을 처음 세운 누군가는 해외에 수천억 원씩 빼돌리다 적발됐다. 해외 소재 페이퍼컴퍼니 사주가 현지에서 번 돈을 페이퍼컴퍼니로 숨겼다 적발되기도 했다. 흔히들 이렇게 적발된 건수보다 훨씬 많은 도피나 은닉이 자행됐으리라 짐작한다. 그러나 이를 제대로 파헤치기가 힘들다는 현실에 우리는 더 우울해진다.

영국 언론인 출신 올리버 벌로가 쓴 '머니랜드'는 이런 현실이 어떻게 처음 만들어졌는지 살핀다. 더 나아가 저자는 은닉된 돈이 어떤 원리로 굴러가는지, 누가 득을 보고 누가 피해를 보는지 현장에서 관련자와 직접 만나 들어본 뒤 기록했다.


머니랜드는 저자가 이름을 붙인 가상의 신세계다. 지도에는 없지만 우리 곁에 실재한다. 저자에 따르면 머니랜드는 '사악한 돈, 야비한 돈, 은밀한 돈이 모이는 곳'이다. 부자만 알아보고 접근할 수 있다. 부자가 아니면 슬쩍 흘겨만 볼 수 있는 그런 곳이다.


머니랜드는 부정한 요구를 가능하게 만드는 시스템까지 아우르는 표현이다. 나라마다 다른 사법제도의 빈틈을 파고들거나 사법관할 구역 간 차이를 교묘하게 악용하는 방법으로 유지된다. 저자는 "머니랜드인(人)은 공동체에서 훔친 자기 자산을 그 바깥에 간직할 수 있기 때문에 공동체 내 장기적인 일에 관심이 없다"며 "머니랜드에서의 관건은 자본을 효율적으로 배치해 최대의 수익을 얻는 게 아니라 자본을 몰래 배치해 최대한의 보호를 얻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머니랜드 표지<출판사 제공>

머니랜드 표지<출판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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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니랜드의 기원을 알기 위해선 훗날 '유로본드'로 불리게 된 채권이 어떤 배경에서 나왔는지부터 알아야 한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형성된 '브레튼우즈 체제' 아래 미국 달러화와 금을 토대로 국제통화체계가 마련됐다. 이로써 돈이 국가를 넘나드는 일은 어려워졌다.


미국 뉴욕은 세계 무역과 금융의 중심지로 떠올랐다. 영국 런던의 은행가는 이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독일 출신의 지크문트 바르부르크(1902~1982)는 과거에 없던 채권을 발행하기 위해 백방으로 뛰었다. 세계 각지에서 흘러들어온 스위스 은행 비밀계좌의 숨겨진 돈을 굴리고 싶었다. 그는 '핫머니'가 국경 너머로 흐르지 못하게 막은 규제와 과세제도를 무력화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고심했다. 사법관할 구역을 어떻게 교묘히 피할 수 있는지도 따졌다.


저자는 "유로본드는 돈의 출처를 불문하고 숨겨야 하는 현금을 지닌 모두에게 편했다"며 "이것이야말로 머니랜드의 마법정원에 들어가는 문을 부자가 열어 놓은 첫 순간이라고 할 법하다"고 표현했다.


머니랜드를 굴러가게 만드는 핵심은 자산 숨기기다. 가장 흔한 방법이 서류에만 존재하는 유령회사로 소유권을 쉽게 알아볼 수 없도록 흐리는 것이다. 일례로 런던 할리스트리트에 명목상의 회사를 둔다. 이어 그 회사를 다시 리히텐슈타인, 맨섬, 케이맨제도, 라이베리아 같은 역외 사법관할 구역의 소유로 등록한다.


여기에 스위스 은행 비밀계좌를 덧붙이거나 신탁으로 재산을 양도하는 것과 같은 수법까지 보태면 자산의 기원과 소유권은 숨기고 세금도 피할 수 있다. 아예 자신이나 자녀의 사법관할 구역을 옮겨버리는 전술도 있다. 돈을 주고 아프리카 후진국의 외교관 신분증을 발급받은 사례, 일본에서 대리모 출산을 한 중국공산당 간부의 사례가 대표적이다.


머니랜드를 쓴 영국 출신 언론인 올리버 벌로<출처:Paul Musso>

머니랜드를 쓴 영국 출신 언론인 올리버 벌로<출처:Paul Muss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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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곳곳에 숨겨진 돈의 규모가 적게는 10조달러(약 1경1950조원) 안팎, 많게는 32조달러나 된다는 추정치도 있다. 돈이 빠져나간 나라가 피해를 받을 것은 분명하다. 나이지리아는 북부지역 통제권을 잃어 수백만 명이 고향에서 내몰려야 했다. 우크라이나는 수년 동안 도로를 제대로 관리하지 못했다. 백신이나 치료제 매입 과정에서 가격 부풀리기로 돈을 빼돌리는 공무원도 있다. 이는 사회를 위태롭게 만든다. 게다가 국가가 이런 일을 제대로 제재하지 못한다는 인식이 확산되면 사회제도 전반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머니랜드에 등장하는 실제 사례는 공분을 자아낸다. 굴나라 카리모바는 우즈베키스탄 대통령의 딸이자 팝가수ㆍ외교관으로 화려한 생활을 즐기며 외국 통신업체로부터 뇌물까지 받아 챙겼다. 국민 중 3분의 2가 하루 2달러 미만으로 근근히 살아가는 앙골라의 부통령 딸은 뉴욕 웨딩숍에서 20만달러를 썼다.


저자는 이들에 대해 비난하고 법적ㆍ도덕적 책임을 묻는 데 그쳐선 안 된다고 주장한다. 후진국의 '도둑 정치가'를 돕는 선진국의 최상급 은행가ㆍ변호사ㆍ회계사ㆍ로비스트가 있기 때문이다. 이쯤되면 다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게 된다. 나쁜 건 자본인지 아니면 자본가인지. 선악의 잣대를 들이대는 게 무의미한 건지. 답은 쉽지 않다.




최대열 기자 dychoi@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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