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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 굽는 타자기]막장드라마보다 더한...문학 거장들의 '미친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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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친 사랑의 서' / 섀넌 매케나 슈미트ㆍ조니 렌던 지음 / 허형은 옮김 / 문학동네

[아시아경제 김지희 기자] 1926년 12월 어느 날, 한 여성이 사라졌다. 실종 당일 이 여성은 남편과 말다툼을 했다. 남편은 내연녀를 만나겠다며 집을 뛰쳐나갔고, 그날 밤 아내 역시 아무에게도 행선지를 알리지 않은 채 집을 나섰다. 다음날 저택에서 조금 떨어진 시골길에서 여성의 차량이 발견됐다. 차 안에는 모피코트와 여행 가방이 덩그러니 남아있을 뿐 여성의 모습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경찰은 대대적인 수사를 시작했고, 그녀가 발견되기까지는 꼬박 열흘이 걸렸다. 이후 여성이 발견된 곳은 한 고급 호텔. 진짜 기이한 일은 여기서부터다. 여성은 연락을 받고 호텔로 달려온 남편을 몰라보는 듯 했고, 심지어 남편의 내연녀 이름을 가명으로 사용하며 호텔에 투숙 중이었다.


막장드라마 같은 이 이야기에 등장하는 여성은 바로 '오리엔트 특급 살인' 등으로 잘 알려진 추리소설가 아가사 크리스티다. 이야기의 주인공이 아가사 크리스티라는 사실을 알고 보면 소름 돋는 일화가 하나 더 있다. 크리스티는 실종 상태로 호텔에 머무는 동안 다른 투숙객들과 '애크로이드 살인사건'을 집필하고 최근 실종된 추리소설 작가, 바로 자기 자신의 이야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나누기까지 했다고 한다. 과연 아가사 크리스티의 삶은 세계적인 대문호들에겐 감히 대입해 상상할 수도 없는 매우 예외적인 경우일까.

저널리스트 섀넌 매케나 슈미트와 조니 렌던이 쓴 '미친 사랑의 서'는 이 같은 물음에 분명하게 'NO'라고 대답해주는 책이다. 책에는 세계적인 문인들의 러브스토리에 관해 집요한 취재한 결과물이 담겼다. 저자들은 전작 '소설기행'을 위해 소설 속 장소와 문인들의 일상을 추적하다 이 책을 쓰게 됐다. 무엇보다 그 미친 연애와 결혼의 흔적들이 그들의 작품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는 게 저자들의 분석이다. "상식을 벗어나거나 상상을 뛰어넘을 정도로 외설스러운, 흥미롭고도 충격적인" 사랑이야기 속에 대작의 퍼즐조각이 담겨있음을 발견하고 이야기를 하나둘 정리하기 시작한 것이다.


책에는 드라마에서도 보기 힘든 다양한 형태의 러브스토리가 담겨 있다. 삼각관계나 사각관계, 불륜과 같이 막장드라마 단골소재 정도의 이야기는 놀라울 것도 없다. 나이차가 55세인 연상연하 커플(아서 밀러), 이중결혼(아나이스 닌), 근친상간(바이런) 등 더한 사례가 수두룩하다.


물론 저자들이 파고든 세계문학의 거장 101인 모두가 치정극에 가까운 러브스토리를 가진 것은 아니다. 2년 가까운 연애기간 동안 500통 넘는 편지를 주고받다 결혼에 골인한 시인 엘리자베스 브라우닝과 로버트 브라우닝 부부, 유부녀 패니 오스본에게 끊임없이 사랑을 고백하고 15년 동안의 행복한 결혼생활을 이어간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 남편의 외도로 고통을 겪었던 아가사 크리스티 역시 열네 살 연하의 고고학자 맥스 맬로언을 만나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다.

책에 담긴 일화들 가운데 일부는 흥미로움을 넘어 때론 불쾌감을 줄지 모른다. 예술가 개인의 사생활을 굳이 이렇게 속속들이 알 필요 있을까 하는 의문마저 들 수 있다. 다만 책은 각각의 일화들에 특정한 가치 판단을 내리거나 강요하는 데까지 나아가지 않는다. 담담한 스토리텔링 탓에 '막장드라마'에 흥분한 스스로의 모습이 머쓱하게 느껴질 정도다. 책장을 넘기며 이들의 부도덕함을 비난해도, 애끓는 사랑에 공감해도 된다. 그 판단은 오롯이 개인의 몫이다.


사실 저자들이 문인들의 사생활을 이토록 집요하게 풀어낸 건 그 삶을 평가하겠다는 의도는 아니다. 그들의 독특한 사랑이야기가 작품에 어떻게 녹아들었는지 보여주기 위함이다. 그러니 내가 사랑한 작품의 한 장면이 이런 '실화'에서 영감을 받았다는 사실을 그저 아는 것은 이 책을 받아들이는 제법 괜찮은 방법이 될 수 있다.


물론 저자들의 의도와는 별개로 약간의 주의는 필요할 듯하다. 스콧 피츠제럴드가 아내인 젤다 피츠제럴드의 일기장을 훔쳐보고 심지어는 베끼기도 했다는 사실을 알고 나면 '위대한 개츠비'의 화려함은 일순 초라해진다. 근친상간 등으로 이혼 당한 바이런이 '돈 후안'을 통해 아내를 저격한 일화를 듣는다면 이토록 지질한 서사시가 있을까 하는 마음이 들지 모른다. 작품이 주는 진한 감동과 여운을 지켜갈 수 없다는 우려 역시 이 책을 집어든 개인이 감당해야 할 몫이다.




김지희 기자 ways@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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