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리플 팹' 도입으로 기존 공장과 차별화
HBM4·첨단 파운드리 복합 생산 기지
평택-용인-테일러 잇는 글로벌 공급 거점 구축
어둠을 뚫고 100m 높이의 크레인 수십 기가 위용을 드러냈다. 4일 새벽 6시, 경기도 평택시 고덕동 삼성전자 평택 캠퍼스 5공장(P5) 건설 현장은 새벽의 추위 속에서도 차세대 반도체 공정을 확보하기 위한 공사 열기로 가득했다. 아직 해가 뜨기 전이었지만 현장은 수백 개의 서치라이트가 거대한 콘크리트 골조를 비추며 대낮 같은 시계를 확보하고 있었다. 그 사이로 늘어선 크롤러 크레인(궤도형 크레인)들이 일제히 가동을 시작하며 거대한 철제 구조물 사이를 훑었다.
현장 입구는 이른 아침부터 모여든 인부들로 북적였다. 두꺼운 방한복 차림에 안전모를 쓴 노동자들이 끊임없이 현장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하루 투입 추정 인력만 약 1만5000~2만명. 소도시 인구 전체가 매일 아침 반도체 초격차의 물리적 토대를 쌓기 위해 이곳으로 집결하는 셈이다. 멀리서 기계 가동음과 작업 지시를 주고받는 호각 소리가 이어졌다. 현장에는 삼성전자가 강조해온 반도체 기술 격차 속도전과, 추격을 허용하는 순간 경쟁력이 흔들릴 수 있다는 '초격차' 전략의 위기의식이 고스란히 배어 있었다.
2028년 완공 시 평택 캠퍼스의 상주 인력은 10만명을 넘어설 것으로 예상된다. 이는 단순한 공장 증설을 넘어 평택 일대 산업 구조 전반을 바꾸는 대규모 생산 생태계 확장으로 해석된다. 불과 수개월 전까지만 해도 이곳은 공사 중단설과 설계 변경 논란이 이어지며 불확실성이 부각됐던 현장이었다. 그러나 현재 P5는 대규모 장비 반입과 공정 구축이 본격화되며 차세대 반도체 경쟁의 핵심 거점으로 빠르게 자리 잡고 있다.
P5의 승부수 '트리플 팹'
업계에선 P5 건설에 약 60조원 이상이 투입될 것으로 추산한다. 단일 라인 기준 역대 최대 규모다. 이 같은 기록적인 대공사의 배경에는 P5가 처음으로 도입하는 '트리플 팹'이 있다. 기존 P1~P4 공장은 웨이퍼의 공정이 이뤄지는 클린룸을 1~2층에 배치한 '더블 팹' 구조로 운영한다. P5는 한술 더 뜬다. 클린룸을 수직으로 3개의 층으로 쌓아 올려 단위 면적 당 생산 효율을 극대화한다. 층별로 고대역폭메모리(HBM), D램,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등 서로 다른 공정을 독립적으로 배치함으로써 시장 상황에 따라 유연하게 대처하는 복합 생산 기지를 만들겠다는 심산이다.
운신의 폭이 넓어지는 만큼 트리플 팹은 단순히 건물을 높게 올리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기술력을 요한다. 특히 반도체는 미세한 진동에도 불량이 발생하기 때문에 3개 층에 들어갈 수천 대의 장비의 진동을 완벽히 잡는 것이 관건이다. 1층부터 3층까지 수직·수평으로 웨이퍼를 옮겨줄 무인 이송 로봇(OHT)의 물류 동선도 최적화해야 한다. 시공을 맡은 삼성물산은 반도체 생산에 필수적인 가스 배관, 전기 선로 등 유틸리티 모듈을 별도로 제작하는 모듈러 공법을 채택했다. 현장 작업 비중을 줄여 용접·조립 오류를 최소화하고, 공사 기간을 비약적으로 단축하겠다는 전략이다.
구상대로 공장이 완공되면 P5에는 층마다 클린룸 2개가 배치돼 총 6개의 클린룸이 들어간다. P4(클린룸 4개)보다 생산 능력이 50% 증대되는 셈이다. P5의 생산 품목이 확정되진 않았으나 HBM4(6세대) 이상의 차세대 메모리와 2㎚(1㎚=10억분의 1m) 이하 초미세 파운드리 라인이 공존하는 '하이브리드 팹'으로 운영될 가능성이 높다.
다가오는 'HBM4' 전쟁의 병기고
지난해 11월, 멈춰있던 P5의 타워크레인을 다시 움직인 건 반도체 슈퍼사이클의 도래다. AI 데이터센터 확산으로 메모리 가격이 천정부지로 치솟으면서 물 들어올 때 노를 저어야 하는 상황이 온 것이다. 전년 대비 몸값을 두 배 넘게 불린 범용 D램이 올해 최대 격전지로 꼽히는 HBM4 시장 참전 기업에 가격 협상력을 부여하고 있는 점도 호재다. SK하이닉스와의 HBM3E(5세대) 경쟁에서 고배를 마신 삼성전자에 HBM4는 전세를 역전할 절호의 기회다.
류형근 대신증권 연구원은 "삼성전자가 HBM4 구동 속도에서 고객사들의 호평을 받는 점 등을 고려할 때 지난날의 부진을 딛고 재기에 성공할 것으로 보인다"며 올해 HBM 매출액을 전년 대비 183% 성장한 23조7000억원으로 추정했다. 삼성전자는 지난달 말 열린 2025년 4분기 실적발표 콘퍼런스콜에서 "주요 고객사의 요청에 따라 2월부터 최상위 버전인 11.7Gbps 제품을 포함한 HBM4 물량의 양산 출하가 예정돼 있다"며 "HBM4E(7세대)의 경우 올해 중반 스탠더드 제품으로 먼저 고객사 샘플링 예정"이라고 밝혔다.
삼성전자는 지난해 4분기 국내 기업 중 처음으로 분기 영업이익 20조 시대를 열었다. 매출 역시 93조8374억원으로 분기 기준 역대 최대치를 경신했다. 연간 매출도 333조6059억원으로 신기록이다. 전날엔 주가가 장중 16만9000원을 돌파하며 국내 그 어떤 기업도 가보지 못한 시가총액 1000조원 고지에 깃발을 꽂았다.
삼성 반도체 제국…평택-용인-테일러 '삼각편대'
이를 통해 확보된 막대한 자금과 현금 창출력은 곧 삼성의 '반도체 제국' 건설을 위한 밑거름이다. 삼성전자는 향후 5년간 연구개발(R&D)을 포함한 국내 투자에 총 450조원을 투입하겠다고 공언한 상태다. 'HBM4 전초 기지'로 탈바꿈 중인 평택 캠퍼스를 필두로 미국 텍사스주에선 2㎚·3㎚ 기반 AI·고성능 컴퓨팅(HPC) 칩을 담당할 테일러 공장이 출정 준비를 마무리하고 있다. 테슬라, 엔비디아 등 미국 본토의 대형 고객사를 가로채기 위한 수주 영업의 최전선이다.
TSMC가 장악한 시스템반도체 시장에서도 영토 확장에 나선다. 삼성전자가 향후 20년간 약 360조원을 쏟아붓는 용인 반도체 국가산업단지는 첨단 시스템반도체 팹 6기를 비롯해 150여개의 소재·부품·장비(소부장) 기업, 팹리스(설계), 연구소가 유치될 예정이다. 업계에선 물가 상승과 최첨단 장비 도입 등으로 최종 투자비가 약 400조원에 육박할 것이란 분석도 나온다.
업계 관계자는 "그동안 은행권 자금을 잘 이용하지 않던 삼성전자가 3조6000억원 상당의 대출 잔액을 기록하는 등 투자 재원을 마련하는 방식이 유연해지고 있다"며 "전폭적인 시설 투자를 통해 반도체 슈퍼사이클에서 선두권을 놓치지 않겠다는 의지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라고 짚었다. 김동원 KB증권 리서치본부장은 올해 삼성전자의 영업이익을 170조원으로 추산하며 TSMC(124조원 추정)를 제치고 글로벌 영업이익 톱10에 진입할 것으로 내다봤다.
김진영 기자 camp@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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