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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폭행범, 피해자와 결혼해라" 인도 대법 논란…우리도 그랬다 [한승곤의 사건수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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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대법원, 성폭행 가해자에게 피해 여성과 결혼 종용 논란
과거 우리나라 사법부도 똑 같은 판결
韓 재판부 성폭행 피해 여성에 "기왕 버린 몸이니 짝을 지어줘 백년해로 시키자"
성별 간 차이로 불균형 인지하는 성인지감수성 판결 자리 잡을까

자료사진. 인도의 한 재판부가 성폭행 가해자에게 피해자와 결혼을 종용해 사회적 논란이 일고 있다. [이미지출처=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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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한승곤 기자] 인도 대법원이 성폭행 혐의를 받는 남성에게 피해자와 결혼을 제안해 사회적 논란이 일고 있는 가운데 우리나라도 사법부도 과거 이 같은 말을 해 공분이 일어난 바 있다. 다행히 지금은 성인지감수성에 대한 재판부의 관심이 높아진 상황이다.


성인지감수성(gender sensitivity)이란 성별 간의 차이로 인한 일상생활 속에서의 차별과 유·불리함 또는 불균형을 인지하는 것을 의미한다. 1995년 중국 베이징에서 열린 제4차 유엔여성대회에서 사용된 후 국제적으로 통용되기 시작했다.

2일 '더힌두' 등 인도 현지언론에 따르면 샤라드 A. 봅데 대법원장은 전날 성폭행 혐의로 기소된 피고인에게 "압력을 가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하며 해당 여성과 결혼하지 않을 경우 감옥에 갈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고 말했다.


피고인의 직업은 공무원으로 이 여성이 고등학교에 재학하고 있을때부터 수년간 스토킹하고 성폭행한 혐의로 기소됐다. 이날 대법원에서는 피고인이 낸 보석 요청에 대한 심리가 진행됐다.


대법원의 제안에 대해 이 남성은 "처음에는 (그 여성에게) 청혼했지만, 지금은 그녀와 결혼할 수 없다"며 "현재 (다른 이와) 결혼한 상태"라고 답했다.

그런가 하면 대법원은 이날 또다른 사건 심리에서 지속적인 동거 기간에 이뤄지는 성관계는 성폭행이 될 수 없다는 견해를 밝히기도 했다.


이 심리에서는 피해를 호소하는 여성이 결혼을 약속한 남성으로부터 잔혹하게 성적으로 학대당했다고 주장했다. 반면 해당 남성은 동거하던 여성이 관계가 나빠지자 성폭행을 당했다며 소송을 제기했다고 이 여성의 주장을 반박했다.


봅데 대법원장은 "두 사람이 남편과 아내로 살아갈 때 남편이 잔혹하고 실수를 저지를 수 있다"며 "하지만 이들 사이의 성관계를 성폭행이라고 부를 수 있겠느냐"고 말해 사실상 남성 주장에 힘을 실어줬다. 부부간 성적 학대를 범죄로 판단하지 않는 듯한 대법원장의 발언은 인도 국민들 사이에서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이미지출처=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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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대법원장의 성인지감수성이 없는 것으로 보이는 발언은 과거 우리나라에서도 나온 바 있다. 언론 보도 등에 따르면 1955년 대학 재학 중 해병대에서 헌병 부사관으로 복무하던 27살의 김 모씨는 수십명과 성관계를 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당시 김 씨는 6.25에 참전해 대위로 진급했으나 장교로 복무하던 중 불명예 제대를 했다. 그럼에도 그는 대위라고 신분을 속였고 수 많은 여성과 성관계를 했다.


김 씨 혐의는 혼인빙자간음죄와 공무원 사칭 등이었다. 그는 법정에서 "나는 결혼을 약속한 적 없고 여자들이 제 발로 따라왔다. 댄스홀(지금의 나이트클럽) 에서 함께 춤을 춘 후에 여관으로 가는 것이 상식화되어 있었으므로 구태여 마음에도 없는 결혼을 빙자할 필요가 없었다"라고 진술했다. 이어 "그 많은 여대생은 대부분 처녀가 아니었으며 단지 미용사였던 한 여성만이 처녀였다"라고 주장했다.


그러자 1심 재판부는 "법은 정숙한 여인의 건전하고 순결한 정조만 보호할 수 있다"라며 혼인빙자간음죄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이어 피해 여성들에게 '문란한 여성'이라는 지적을 하는 등 2021년 사법부 현실과 비교하면 성인지감수성 결여는 물론 재판 자체가 아예 엉터리로 흐르는 등 피해자들 입장에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판결이었다. 이후 해당 사건은 항소심을 통해 유죄가 선고되어 1년의 징역형이 확정됐다.


이와 유사한 사법부 판결은 1973년에도 나왔다. 당시 언론 보도 등에 따르면 10대 남성이 동급생 여성을 성폭행하는 사건이 발생했는데, 1심 재판부는 이 남성에게 징역형을 선고했으나, 2심 재판부는 "그럴게 뭐 있느냐? 기왕 버린 몸이니 오히려 짝을 지어줘 백년해로 시키자"라고 말했다.


해당 판사는 양가 부모를 설득해 법정에서 약혼까지 치르게 했다. 당시만 하더라도 성범죄의 경우 피해자가 고소해야만 처벌이 가능한 '친고죄'에 해당되었기 때문에 피해자 측과 합의가 되면 가해자는 처벌받지 않았다.


그런가 하면 20여 년 전에도 유사한 판결이 있었다. 가해자는 당시 23살의 포클레인 기사 이 모 씨로 그는 밤늦게 비를 맞으며 택시를 기다리는 고등학교 2학년 여고생에게 "목적지까지 데려다주겠다"라며 차에 태운 뒤 외진 곳으로 데려가 성폭행했다. 그리고 범행 다음날 이 씨는 피해자를 또 만나기 위해 찾아갔다가 피해자의 학교 교사로부터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에게 붙잡혔다.


피해자의 부모는 가해자인 이 씨 부모의 부탁으로 선처를 바라는 탄원서를 제출했다. 그러나 1심 재판부는 "외딴곳에 서 있는 여성을 차에 유인한 뒤 성폭행한 점으로 미뤄 계획적 범행으로 여겨지는 등 죄질이 나쁘다"라며 이 씨에게 2년 6개월의 실형을 선고했다.


문제는 또 다른 탄원서였다. 피해자의 부모는 항소심에서 "양쪽 부모가 두 사람을 성혼시키기로 했으니 선처를 바란다"라는 탄원서를 다시 제출했고 서울고법은 "이 씨의 부모와 피해자 부모가 '자녀가 자란 뒤 성혼시키자'라고 합의한 만큼 집행유예를 선고한다"라며 3년의 집행유예를 선고했다.


피해자인 여고생의 입장은 얼마나 반영되었는지 알 수 없다. 사실상의 2차 가해로 이 학생이 받았을 고통은 그야말로 처참하고 끔직했을 것으로 보인다.


한편 성인지감수성은 지금의 재판부에서는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 일례로 지난해 3월 'n번방 사건' 관련 재판에서 오덕식 부장판사를 제외해달라는 내용의 청와대 국민청원이 그해 3월31일 오전 42만 명 이상의 동의를 받기도 했다.


한국여성단체연합은 유튜브로 생중계한 제36회 한국여성대회에서 '텔레그램 n번방 운영자와 공모자들'과 함께 오 판사를 성 평등 걸림돌로 선정했다며, "재판 과정에서 가해자를 비호하며 2차 가해를 했다"는 이유를 들었다.


오 판사는 과거 성범죄 관련 재판에서 가해자에게 관대한 판결을 내렸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2019년 8월, 협박과 상해 등 혐의로 기소된 가수 고(故) 구하라의 전 남자친구 최종범 씨에게 징역 1년 6개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하면서, 최 씨가 구하라의 신체를 불법 촬영한 혐의에 대해서는 무죄를 선고했다. 문제의 동영상을 촬영한 경위와 실제로 이를 유출·제보하지는 않았다는 점 등을 살펴봤을 때 최 씨가 동영상을 불법 촬영했다고 볼 수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한국여성단체연합은 '오덕식 판사는 텔레그램 성 착취 관련 재판을 맡을 자격이 없다'라는 제목의 성명을 내고, 사법부는 성폭력 관련 재판에 성인지 감수성을 가진 재판부를 배정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마련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이후 서울지방법원은 'n번방' 관련 피고인인 '태평양' 이 군의 담당 재판부를 오 판사가 맡은 형사20단독에서 박현숙 판사가 맡은 형사22단독으로 재배당했다.


법원은 "청와대 청원 사건을 처리하는 데에 담당 재판장이 현저히 곤란한 사유가 있다고 인정되고, 담당 재판장이 그 사유를 기재한 서면으로 재배당 요구를 했다"고 설명했다.




한승곤 기자 hsg@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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