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박병희 기자] '모진 바람이 분다/그런 속에서 피비린내 나게 싸우는 나비 한 마리의 상채기.' 시인 박봉우(1934~1990)의 '나비와 철조망' 중.
꽃을 찾아다니는 나비의 모습이 아름답지만 한편으로는 처절하고 애처롭다. 나비는 바람이라는 시련 앞에서 한없이 연약한 존재. 그래서 나비의 날갯짓은 혼신을 다하는 모습 그 자체다.
서울 종로구 소격동 국제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는 문성식 개인전 '아름다움, 기묘함, 더러움'에서 그의 작품 속 나비를 보면 모질게 날개에 아로새겨진 세월의 풍파가 느껴진다. 문성식 작가의 독특한 작품 제작 방식 때문인 듯하다.
문성식은 우선 캔버스 전체를 검은 색으로 채운다. 검은 바탕 위에 석고와 아교가 혼합된 회화 재료인 하얀 젯소를 바른다. 그는 젯소가 반건조된 상태에서 칼ㆍ송곳 같은 날카로운 도구로 젯소를 긁고 떼어낸다. 그러면 처음 캔버스를 채웠던 검은 색이 드러나면서 그림은 그려진다. 붓 대신 칼과 송곳으로 그림을 그리는 셈이다.
그렇게 그림이 완성되면 구아슈로 채색해 작품을 완성한다. 구아슈는 물과 고무를 섞어 만든 불투명한 수채 물감이다.
날카로운 칼과 송곳으로 그리는 그림이기에 그의 작품은 오랜 시간을 필요로 한다. 긁어내 그리기에는 매끄럽지 않고 거친 느낌을 주며, 불투명한 물감으로 채색하기에 투박한 느낌이 든다.
얼핏 고분 벽화가 연상된다. 오랜 시간을 들이는 만큼 바래고 예스러운 느낌. 세월의 풍파도 초월한 나비의 날개를 표현하는 데 이보다 더 어울리는 작업 방식이 있을까 싶다. 그는 이런 작업방식을 직접 고안했다. 그리고 이를 '스크래치 기법'이라고 이름 붙였다.
문성식은 한때 장미에 매혹됐다. 3년 정도 장미를 키웠다. 그는 "장미를 키우면서 벌레와 나비, 새가 꼬이는 장면도 목격했다"며 "세계의 축소판이 아닐까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문성식은 이번 전시에서 '끌림'의 메시지를 전한다. 장미로 몰려드는 나비 같은 그림들이다. 그가 장미에 끌렸던 경험을 담은 '장미와 나'라는 그림도 있다.
그는 스크래치 기법으로 처음 선보이는 회화 연작 '그냥 삶(2017~2019)' 시리즈로 사람이나 곤충이 꽃에 이끌리는 근원적 끌림을 표현했다. 문성식은 '그냥 삶'이라는 제목에 대해 "작품 속에 등장하는 꽃, 나비, 거미, 개, 벌레가 우리에게는 풍경의 개체로 보이지만 그들에게는 무심한 하루 속에서 각자 자신의 길을 가고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그냥 삶'이라는 제목을 지었다"고 했다.
문성식은 꽃이 식물의 성기라는 점에 매료됐다고도 들려줬다. "우리는 식물의 성기를 아름답다고 여기지만 동물의 성기에 대해서는 대개 아름답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아름답다와 추하다는 것의 의미가 무엇일까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스물네 점으로 구성된 구아슈 드로잉 연작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에서는 '본능적 끌림'에 의해 뒤엉킨 남녀의 신체를 묘사한다.
문성식 작가는 25세였던 2005년 이탈리아 베네치아 비엔날레 한국관 전시에 최연소 작가로 참여해 일찌감치 주목 받았다. 그는 "아무것도 없는데 작가로서 일찍 알려졌다. 내공을 쌓을 시간이 없었다. 그것이 나의 콤플렉스다"라고 했다.
그래서일까. 다시 개인전을 여는 데 시간이 꽤 걸렸다. 이번 전시는 2016년 3월 두산갤러리에서 열린 '얄궂은 세계' 이후 거의 4년 만에 갖는 개인전이다. 국제갤러리에서 여는 두 번째 개인전이기도 하다. 2011년 첫 개인전 '풍경의 초상' 이후 8년이 걸렸다.
'아름다움, 기묘함, 더러움' 전시를 통해 국제갤러리의 K2와 K3 전시장에 문성식의 신작 150여점이 전시된다. 전시는 오는 31일까지다.
박병희 기자 nut@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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