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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시비비] 진보, 부르다가 발등 찍힐 이름이어서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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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가 뭔 줄 아니? 잘못된 거 수리하는 게 보수야. 진보는 뭔 줄 아니? 다른 사람보다 부지런히 보수하는 진짜 보수가 진보야."


소설가 공지영의 에세이집 '지리산 행복학교'에 나오는 이야기다. 지리산에 묻혀 사는 최 도사란 이가 보수(保守)와 보수(補修), 진보(進步)와 진보(眞補)란 동음이의어를 이용한 일종의 말장난이다. 그런데 이 책에서 유독 이 구절이 기억에 남는다. 요즘 우리 정치가 돌아가는 꼴을 보면 과연 보수와 진보를 가르는 기준은 무엇이고, 어느 것이 바람직한지 궁금하기 때문이다.

사실 보수와 진보를 무 자르듯이 딱 가르기는 어렵다. 그 개념을 명확히 정의하기도 쉽지 않거니와 같은 사람이라도 사안에 따라 다른 입장을 취하는 경우가 더러 있기 때문이다. 그렇더라도 우리는 흔히 진보는 안 좋은 것, 보수는 나쁜 것이란 통념을 유지한다. 보수라 하면 기득권, 부패가 떠오르고 진보라 하면 개혁, 도덕성이 떠오르는 것이 보통이다.


한데 언필칭 '촛불혁명'으로 집권했다는 현 집권 세력의 하는 양을 보면 이게 영 헷갈린다. 현장에선 경제 상황이 어렵다 아우성이고 각종 경제 지표는 암울하기만 한데, "물 들어오고 있다" "통계의 잘못"이라는 엉뚱한 소리를 해대는 걸 보면 진보 정권이 맞는 것 같긴 하다. 진보라 하면 보수에 비해 상대적으로 무능하다는 우리 사회의 선입견에 걸맞으니 말이다.


그런데 환경부가 중심이 된 '블랙리스트' 논란이나 집권 3년 차인 지금도 끊이지 않는 '낙하산 인사' 시비를 보면 자기 편 챙기기가 보수 세력 뺨친다. 진보 진영의 가장 큰 무기라 할 도덕성에서 이전 보수 정권과 다를 바 없어 보인다. 더 문제는 '내로남불' 행태다. 최근의 예를 보자. 결국 한 명 자진 사퇴, 한 명 지명 철회로 일단락되는 모양새인 장관 일곱 명의 국회 인사청문회는 가히 제2의 '문송'이라 할 만했다. "문과라서 죄송합니다"가 아니라 "죄송하다"가 차고 넘치는 청문회가 됐으니 말이다.

게다가 윤도한 청와대 국민소통수석은 지난 1일 자진 사퇴한 최정호 국토교통부 장관 후보자에 대해 "집 세 채 가진 게 문제냐"고 했다. 물론 집 세 채 가진 것 자체는 문제가 아니다. 그러나 "거주 목적이 아닌 집을 파시라"고 다주택자들을 압박하는 정부에서 요직을 지냈고, 주택 정책을 총괄할 이가 그렇다는 것은 도덕성 시비가 일 소지가 충분하다. 이는 마치 병역의 의무를 회피한 이가 국방부 장관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집권 세력의 무신경함의 정점을 찍은 이는 설훈 더불어민주당 최고위원이다. 그는 지난 1일 한 라디오 방송에서 "50대 후반 연배는 위장 전입, 부동산 투기가 통상화되어 있는 사회 분위기였다"고 했다. 그걸 할 수 없었던 50대가 대부분이었을 거라 보지만 그의 말이 맞다 치자. 하지만 진보를 자처하는 집권 세력의 요인이 그런 말을 해서는 안 된다. 그런 식의 합리화는 보수 진영과 무엇이 다른가. 그렇게 치부한 이들에게 명예와 권력을 쥐여주려는 시도가 거듭되는 걸 보면, 그리고 그것이 잘못이란 걸 인정하거나 청와대 인사수석이나 민정수석이 책임질 의사가 없는 걸 보면 적어도 우리 사회에선 진보나 보수나 그 나물에 그 밥이라는 소리가 나올 수밖에 없다.


'기회는 평등할 것이고 과정은 공정할 것이며, 결과는 정의로울 것'이라던 문재인 대통령이 이끄는 정부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진보의 최대 미덕이라는 도덕성은 어디에 있는가. 현 집권 세력이 남길 최대의 폐해는 이른바 진보에 대한 국민적 염증 아닐까. 하기는 미국의 문필가 앰브로즈 비어스는 일찍이 '진보는 미래의 보수'라고 꼬집은 바 있다. 우리는 지금 또 다른 보수의 탄생을 목격하고 있는 건 아닌지 심히 걱정된다.


김성희 북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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