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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은 처음이라] 독립운동에 뛰어든 법조인들 ①편-이준·박상진

최종수정 2019.03.03 21:51 기사입력 2019.03.03 2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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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은 처음이라'는 법알못(알지 못하는 사람)의 시선에서 소소한 법 궁금증을 풀어보는 코너입니다. 법조기자들도 궁금한 법조계 뒷이야기부터 매일 쓰는 사건 속 법리와 법 용어까지 친절하게 설명해드립니다.

[이미지출처=연합뉴스]

[이미지출처=연합뉴스]



사흘간의 연휴 마무리는 잘 하고 계신가요? 이틀 전에는 3·1절 100주년이었습니다. 서울 광화문 광장을 비롯해 전국 곳곳에서 기념행사가 열렸습니다.


3·1운동 당시 활약한 독립운동가는 물론 주목받지 못했던 인물들도 새로 알려지는 계기가 됐습니다. '법은 처음이라'도 법조인 출신 독립 운동가를 소개하는 시간을 마련했습니다. 1편에서는 법조인 출신으로 직접 독립운동에 뛰어든 이준 열사와 박상진 의사, 2편에서는 '독립운동가의 변호인', '조선의 3대 민족 인권 변호사'로 불린 이인·김병로·허헌 의사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대한제국 1호 검사에서 헤이그 특사로… 이준 열사(1859~1907)
1907년 고종황제의 밀명을 받고 당시 만국평화회의가 열린 네덜란드 헤이그로 파견된 이준, 이상설, 이위종 열사의 모습. 당시 특사들은 블라디보스톡에서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타고 네덜란드 헤이그로 이동했다.(사진=국사편찬위원회)

1907년 고종황제의 밀명을 받고 당시 만국평화회의가 열린 네덜란드 헤이그로 파견된 이준, 이상설, 이위종 열사의 모습. 당시 특사들은 블라디보스톡에서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타고 네덜란드 헤이그로 이동했다.(사진=국사편찬위원회)



1894년 함흥의 순릉참봉직에 있던 이준 열사는 갑오개혁으로 개화파 내각이 수립되자 사직하고 상경했습니다. 이듬해, 최초의 근대 법학교육기관인 법관양성소에 입학했고 1회 졸업생이 됩니다. 그는 1896년 한성재판소 검사 시보로 있으면서 부패한 고위관직들을 처벌하려다가 당시 권세가의 미움을 사 33일 만에 면관됐습니다. 이후에도 강직한 성품으로 모함을 받아 두 차례나 검사직을 박탈당했습니다. 면직됐을 당시에는 독립협회 평의장, 일본 와세다 대학 유학, 대한보안회·협동회·적십자회 등 단체에서도 활동했습니다.


그는 강직하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강골 검사였습니다. 그는 대한제국 최고의 사법기관인 평리원의 검사로 재직할 당시 세도가였던 풍양 조씨와 남양 홍씨 사이의 산송을 공정하게 처리해 고종의 신임을 얻습니다. 그는 또 특별법원의 검사로 임명되어 고종의 인척인 이재규 사건을 맡아 징역 10년형을 구형했습니다.


그는1906년 검사복을 완전히 벗어야 하는 순간이 찾아왔습니다. 황태자의 혼례를 앞두고 고종황제가 은사령(특별사면)을 내리자 법부에서는 이준에게 은사 대상자 명단을 전달했습니다. 명단대로 은사안을 작성할 것을 요구한 거죠. 이준 검사는 은사안 작성은 검사의 고유 권한이라며 법부의 요청을 거부했고, 법부는 이준 검사가 작성한 은사안을 변경해 고종황제에게 보고하기에 이릅니다. 이준 검사는 1907년 2월 법부 형사국장 김낙헌을 고소했습니다. 법부는 상관을 고소했다는 이유로 이준 검사를 체포했고, 재판을 치르는 과정에서도 의기를 꺾지 않았습니다.


고종은 1905년 일제의 강압으로 체결한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세계 곳곳에 알리기 위해, 1907년 당대를 대표하는 법률가였던 이준 열사를 헤이그 특사 밀명을 내리게 됩니다. 같은해 4월 그는 부산에서 블라디보스토크로, 상트페테르부르크와 베를린을 거쳐 헤이그까지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러시아를 가로지르는 64일간의 여정을 시작했습니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는 이상설 의사(義士), 상트페트르부르크에서는 이위종 의사를 만나 헤이그로 떠납니다.

을사늑약으로 인해 대한제국의 외교권이 박탈됐다고 주장하는 일본의 방해로 특사 일행은 만국평화회의에 입장을 거부당했습니다. 6월28일에는 대한제국이 독림국임을 밝히고 을사늑약이 무효임을 선언하는 공고사를 평화회의 의장과 각국 대표에게 보냈다. 이후 각국에 호소했지만 또다시 일본의 방해로 실패했습니다. 당시 헤이그 만국평화회보에 “축제 때의 해골”이라는 기사가 나오는 등 외신들을 통해 대한제국 특사들의 호소와 사정이 널리 알려지게 됩니다. 이를 두고 볼 수 없었던 일본은 고종황제를 협박해 헤이그 특사 임명장이 날조됐다는 내용의 서한을 쓰게 됐습니다. 이 때문에 회의장 퇴장을 명령 받게 됐고, 며칠 지나지 않아 이준 열사는 사망하게 됩니다. 당시 국내 언론에서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설에 대해 보도하기도 했으나, 현지언론에서는 종기를 치료하다 숨졌다는 내용이 보도됐습니다.


법관 대신 독립군을 선택한 박상진 의사(1884~1921)
[출처=연합뉴스]

[출처=연합뉴스]



박상진 의사는 울산 출신으로 1905년 양정의숙에 입교해 법률·국제법·경제학을 수학하면서 예비 법조인으로서의 수양을 닦았습니다. 그는 1910년 봄 한국에서 첫 번째로 실시한 판사시험에 합격해 평양재판소 판사로 발령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같은 해 여름 경술국치로 나라를 일본에 뺐기자 판사 취임을 거부했습니다.


그는 일본인에 의해 독단적으로 치러지는 재판보다는 무장독립운동을 하는 것이 나라와 민족을 위해 더 득(得)이 될 것이라고 판단했습니다. 이후 1913년 조선국권회복단 중앙본부를 결성했고, 1915년 7월15일에는 대한광복협회를 결성해 총사령으로 취임했습니다. 그가 창설한 광복협회는 일제의 불법 징수 세금 탈취, 독립운동자금을 지원, 친일분자 색출·암살을 수행했습니다.


1대 부사령에는 황해도 평산군 의병장이었던 이석대(본명 이진룡)을 선임했고, 이 부사령이 순국하자 청산리 전투로 유명한 김좌진 장군을 부사령으로 임명했습니다. 기록들에 따르면 박 의사는 1917년 4월 26일 체포돼 징역 6개월을 선고 받아 복역했고, 그 해 12월20일 광복회 조직이 발각됐습니다. 이로 인해 다시 체포된 그는 1919년 공주지방법원에서 사형을 선고 받았습니다. 만주로 망명했던 부사령 김좌진 장군은 그를 구하기 위해 파옥 계획을 세웠으나, 시행하지는 못한 채 1921년 8월11일 박 의사는 형장의 이슬이 됐습니다.




이기민 기자 victor.lee@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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