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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충훈의 돛단Book] 당신은 '미래'를 기억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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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 '숨겨진 미래' - 개념사 관점으로 본 냉전의 역사
온몸으로 암흑기를 거스른 선각자들의 결을 살피다

올 한 해 한ㆍ북ㆍ미간 소통은 과거 어느 때보다 빠르고 폭넓었다. 북미 정상이 싱가포르 호텔의 정원을 거닐며 담소했고 남북 정상은 백두산에서 손을 맞잡았다. 한국의 재계 대표들과 아이돌 그룹이 평양을 방문하고 북한 대표는 한국의 스마트 공장을 시찰했다. 한국과 미국의 수장은 SNS를 통해 협상의 진전 여부를 전하고 때로는 소문에 직접 해명을 하기도 한다. 비핵화라는 화두를 매개로 진행되는 국가 간 협의는 최근 조금 답보 상태였는데, 또 어제자로 한미 간 정상이 회담을 열고 이를 타개할 대책을 찾는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신간 '숨겨진 미래 - 탈냉전 상상의 계보 1942~1972'의 저자 장세진 한림과학원 교수는 빠른 속도로 불어온 최근의 남ㆍ북ㆍ미 평화모드가 그저 놀랍고 신기할 따름이라고 말한다. 이 변화의 바람으로 인해 거대한 학문적 패러다임의 변화가 예감될 정도라는 것이다. 그는 이럴 때일수록 과거의 순간순간을 다시 살피는 것이 필요하다는 의견을 제시한다. 냉전을 거스르는 힘은 동일한 개념을 다르게 해석할 수 있는 의지, 힘든 오늘을 이기고 다른 미래를 상상하는 능력에 있고 분명 과거 누군가는 그런 상상을 했던 적이 있기 때문이다.
'숨겨진 미래'는 해방 이후 근 30년에 걸친 한반도 냉전의 역사를 개념사적 관점에서 바라본 책이다. 시대의 흐름에 따라 변화하는 개념의 의미를 탐구하는 것을 '개념사'라 하는데, 2006년 타계한 독일 역사학자 라인하르트 코젤렉이 창안한 역사 연구 방식이다. '숨겨진 미래'라는 제목도 코젤렉의 저서 '지나간 미래'에서 착안했다. 코젤렉이 주류로 자리 잡은 정치, 사회적 개념사에 집중했다면 저자는 말 그대로 냉전기라는 큰 역사의 흐름 속에 '숨어 있던' 한반도 지성들의 흔적을 쫓는다.

저자가 참고한 인물과 사건은 다양하다. 우선 월남한 지식인들을 주축으로 발간된 잡지 사상계를 비롯해 최인훈, 염상섭, 이호철 등의 소설가와 그들의 작품, 미국ㆍ소련이 아닌 제3의 길을 찾고자 했던 아시아 국가들의 모임인 '반둥회의'까지 포함한다. 또한 '북한학'이 생성되는 데 기여한 지식인들, 정전으로 인한 '평화'가 아닌 종교적이면서도 적극적인 포용의 '평화'를 추구했던 함석헌 선생의 이야기도 실렸다. 저자는 서문에서 "냉전과 그로 인해 한반도에 부설된 분단이라는 뒤틀린 질서에 어떻게든 출구를 내보려고 했던 사람들, 혹은 존재 자체만으로 이 질서의 괴물 같은 폭력성을 증명했던 그런 사람들을 기억하려는 시도"라고 썼다.


왼쪽부터 염상섭, 이호철, 최인훈, 함석헌 (일러스트 이영우 기자 20wo@)

왼쪽부터 염상섭, 이호철, 최인훈, 함석헌 (일러스트 이영우 기자 20w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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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제1장에서 해방 이후 탈냉전을 구상했던 초기 인물로 소설가이자 저널리스트였던 염상섭을 꼽는다. 그는 좌우파에 치우치지 않는 '중간파'로서의 변혁을 추구했다. 하지만 중간파는 1948년 신탁통치 즈음해서 회생한 우파 세력으로부터 극렬한 비난을 받았다. 우파는 중간파를 '민족 스스로의 힘을 중시하는 세력'이 아닌 '빨갱이임을 슬쩍 감춘 분홍색 프락치' 정도로 봤다. 남한 단독 선거를 앞두고 남북이 합작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중간파들은 우파로부터 '공산주의자들의 앞잡이'로 치부됐다.

염상섭은 소설 '효풍'을 통해 이 같은 분위기를 개탄한다. 효풍의 주인공 중 한 명인 병직은 무산독재도, 일당독재도 아닌 민족주의와 사회주의가 결합한 제3의 체제를 꿈꿨고 이는 작가인 염상섭도 마찬가지였다. 염상섭은 자신이 편집국장으로 재직했던 신민일보가 좌파적 논조를 문제 삼은 미군정에 의해 폐간되고 본인도 구류를 살면서 심정적인 굴복을 하고 만다. '효풍'도 흐지부지한 결말로 맺음한다. 하지만 중간파의 목소리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1947년 창간한 새한민보가 대표적이다. 보름마다 한 번씩 발행한 이 신문은 '신문의 신문'이라는 코너를 통해 여러 매체의 기사를 분석하고 그 편집방향과 방침을 비판했다. 좌우 한쪽 성향의 매체가 사실을 왜곡하거나 전혀 다루지 않는 상황에 개입해 '팩트체크'를 함으로써 미군정의 언론탄압에도 효과적으로 대처했다고 저자는 분석했다.

'숨겨진 미래'는 '중간파'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으로 '농민' '전쟁 포로' 등 특정 상황에 있었던 이들의 이야기도 다룬다. '농민' 편에선 미군사 정부가 첫 호부터 80만부나 발행했던 농업 신문 '농민주보'의 의미를 파헤친다. 당시 미군정은 농민주보를 통해 '농민=이 땅의 뿌리'라는 개념을 심는 데 주력했다. 정부는 농민이 생산한 쌀을 독점 수매하고 이를 다시 도시 노동자에게 저렴하게 공급해 식량배급 불만을 잠재웠다. 저자는 농민주보가 "농촌의 동포들은 다만 그 본분을 좇고 따르고" 지킬 것을 주문하는 권력의 미디어, 치안의 미디어라고 비판했다. 저자는 1946년 농민, 노동자, 학생이 연대했던 대구 10월 항쟁이 이 같은 직분 프레임을 거슬러 '국민'으로서의 정체성을 찾으려했던 시도였다고 평가했다.
반둥회의(1955)

반둥회의(1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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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인도를 비롯한 제3세계 비동맹이 미ㆍ소 양국이 아닌 다른 길을 모색하려 했던 '반둥회의'도 냉전을 거스르는 중요한 움직임이었다. 한국은 모임의 주체가 한국전쟁에서 북한을 도왔던 중국이라는 이유로 이 모임에 불참했으나, 제3의 길을 모색하는 반둥회의 정신은 진보당 당수였던 조봉암의 평화통일론 등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식민지' 파트에 소개된 최인훈의 소설 '총독의 소리'도 눈길을 끈다. '총독의 소리'는 일본이 2차 세계대전에서 패전한 이후에도 조선총독이 여전히 한반도에 숨어 지내며 해적라디오 방송을 한다는 설정의 소설이다. 총독은 "통일의 가장 쉬운 길은 남북이 군비 경쟁을 버리고 각기 체제의 합리성을 높여가는 길"이니 "총독부는 반도인들이 이 같은 해답에 다가서는 길을 막아야 한다"는 말도 한다.

저자는 총독의 이 같은 말들이 24년 뒤인 2000년 6ㆍ15 남북공동선언을 연상시킨다고 썼다. 당시 6ㆍ15선언의 두 번째 항이 "남과 북은 나라의 통일을 위한 남측의 연합제안과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 제안이 서로 공통성이 있다고 인정하고 앞으로 이 방향에서 통일을 지향시켜 나가기로 하였다"이다. 최인훈의 선구적인 통찰력에 새삼 경탄하게 되는 대목이다. 수십 년 전 냉전기 지식인의 말을 오늘날까지 기억해야 할 좋은 증거다.

(숨겨진 미래 / 장세진 지음/푸른역사/2만5000원)




박충훈 기자 parkjovi@asiae.co.kr
이영우 20wo@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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