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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혜의 그림으로 읽는 서양예술사] 사라진 초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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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셰 박사의 초상', 1980년대 부동산 버블 일본의 그림 1만 점 무차별 매입 속 사라진 명작

빈센트 반 고흐, '가셰 박사의 초상'(1890년)

빈센트 반 고흐, '가셰 박사의 초상'(189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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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0년 5월 반 고흐는 두 해 동안의 아를 생활을 청산하고 파리 근교 오베르 쉬르 우아즈에 자리 잡았다. 파리와 가까우면서 집세가 쌌고, 정신과 의사인 가셰 박사가 살고 있다는 점도 유리했다. 우울증 연구로 학위를 받은 가셰 박사는 그 해에 부인과 사별하고 오베르 쉬르 우아즈에서 은퇴 생활을 시작한 참이었다. 그는 반 고흐가 죽기 전 마지막 두 달 동안 가장 가깝게 지낸 사람이었다. 하지만 당시의 의학 수준으로는 가셰 박사가 반 고흐에게 해줄 수 있는 일이 거의 없었다. 박사는 반 고흐가 비교적 멀쩡한 것을 보고 "그림에 몰두하라!"는 처방을 내렸다.
반 고흐는 이 초상화를 6월3일 착수해 사나흘 만에 완성했다. 가셰는 턱을 괴고 생각에 잠겨있다. 컵에는 강심제 원료인 디기탈리스가 꽂혀 있다. 가셰의 직업을 암시한다. 상에는 노란색 표지가 달린 책 두 권이 놓여 있다. 공쿠르 형제의 소설 '제르미니 라세르퇴'와 '마네트 살로몽'이다. 전자는 정신질환, 후자는 예술을 주제로 삼고 있다. 가셰 박사는 우울해 보인다. 바탕의 푸른색, 움직이는 듯 캔버스를 가득 메운 붓 자국이 주인공의 눈빛에 담긴 우울함과 불안을 증폭시킨다. 반 고흐는 박사가 자신을 치유해주길 바랐지만 자신과 마찬가지로 불안에 시달리는 인간을 발견했을 뿐이다.

7월 말 반 고흐는 자살했다. 반 고흐가 갖고 있던 그림들은 동생 테오에게 상속되었다. 형이 죽은 지 불과 6개월 만에 테오도 병으로 세상을 떴고 그림들은 테오의 아내 요한나에게 넘어갔다. 요한나는 1897년 '가셰 박사의 초상'을 한 수집가에게 300프랑을 받고 팔았다. 오늘날 화폐 가치로 환산하면 1000달러 남짓한 가격이다.

초상화는 두어 명의 수집가를 거쳐 1911년 프랑크푸르트에 있는 슈테델 미술관의 소유가 됐다. 20세기 전반까지 대부분의 미술관들은 당대 작품 수집에 거의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독일 미술관들은 좀 달랐다. 슈테델 관장 슈바르젠스키는 진보적인 사람으로 당대 작품 컬렉션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 계획의 일환으로 사들인 첫 번째 작품이 '가셰 박사의 초상'이었다. 슈테델 미술관은 2만프랑을 지불했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한 독일은 왕정을 폐지하고 공화정을 선택했다. 나라 이름도 바꿨다. 바이마르 공화국은 1919년 사회민주주의를 표방하고 출범했으나 1933년 나치당이 집권하면서 14년 만에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그동안 소요와 분란이 끊이지 않았고, 전쟁 배상금과 극심한 인플레이션으로 경제 상황도 최악이었다. 정치적 혼란과 불황이 지속되면서 극좌와 극우는 물론 급기야 온건한 자유주의자들까지 등을 돌렸다. 바이마르 공화국의 실패는 히틀러의 파시즘에 문을 열어주었다.

빈센트 반 고흐

빈센트 반 고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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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바이마르 공화국 시대는 사상적, 문화적으로 대단히 자유로웠다. 20세기를 이끈 새로운 사상과 과학의 패러다임이 이 시기 독일에서 탄생했다. 프랑크푸르트는 문화와 학문의 중심지였다. 1924년 설립된 사회연구소에는 아도르노, 벤야민 같은 학자들이 포진해 프랑크푸르트학파를 형성했으며 슈테델은 전위적 작품을 가장 많이 소장한 미술관 중 하나였다.

1933년 집권한 나치당은 예술을 정치선전 도구로 여겼다. 예술가들에게 협력을 강요하고 나치 이념에 위배되는 작품 활동을 금지했다. 인종 청소와 예술품 청소도 병행했다. 미술학교 교수, 미술관 관장 등 공직에 있는 유태인들을 몰아내고 미술관이 소장한 현대 예술품들을 압수했다. 슈테델 미술관도 '가셰 박사의 초상'을 포함해 공들여 모은 현대 미술 컬렉션을 압수당했다. 나치의 관점에서 보자면 모더니즘이란 인간의 타락상을 드러내는 부도덕하고 흉측한 그 무엇일 뿐이었다.

1937년 나치는 5200점이 넘는 몰수품 중 650점을 추려 '퇴폐미술전'을 개최했다. 모더니즘의 폐해를 광고하고, 모더니즘을 모욕하기 위한 전시회였다. 작품들은 의도적으로 무질서하게 내걸렸고, 전시장 벽에는 조롱하는 문구가 휘갈겨 쓰여 있었다. 순회 전시 후 작품은 헐값에 처분됐다. 나치 고위직들, 정권에 조력한 미술상들은 값나가는 작품을 자기 몫으로 빼돌렸다. 나머지 작품들은 1939년 3월 광장에 쌓아놓고 불태워버렸다.

'가셰 박사의 초상'은 나치 금융업자 프란츠 쾨니히스의 손에 들어갔다. 그는 안전을 위해 구입한 작품들을 암스테르담에 있는 동업자 지그프리트 크라마르스키에게 보냈다. 제2차 세계대전이 확산되고 네덜란드도 전쟁에 휘말리자 크라마르스키는 친구가 맡긴 미술품들을 가지고 미국으로 이주했다. 쾨니히스는 전쟁 동안 의문의 사고로 죽었다.

크라마르스키는 '가셰 박사의 초상'을 소유하게 되기까지 구린 점이 있었으므로 세간의 이목을 끄는 걸 원치 않았다. 1961년 그가 세상을 떠난 후에도 가족들은 작품을 공개하지 않았다. 1970년대에 소규모 전시회에 한 번 대여했을 뿐 꽁꽁 숨기고 있다가 20년이 지난 1984년에야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장기임대 형식으로 전시를 허용했다.

그동안 미술시장은 팽창일로를 걸었다. 전후의 경제적 황금기에 미술시장은 활황을 맞았다. 반 고흐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연구가 활발해지면서 작품 가격은 올라갔다. 1970년대 초 오일 쇼크 이후 서구 경제는 침체 국면에 들어갔으나 특수한 형태의 사치품인 미술품은 가격이 오히려 상승하는 현상을 보였다. 1980년대에는 미술품 가격이 그야말로 미친 듯 치솟았다. 1987년 반 고흐의 '해바라기'가 3990만달러라는 천문학적 가격에 낙찰됐다.

엄청난 가격 상승에 마음이 동했을까. 1990년 크라마르스키 가족은 그림을 팔기로 결정했다. '가셰 박사의 초상'은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서 크리스티 뉴욕지점으로 옮겨졌다. 초상화가 그려진 지 100년, 크라마르스키가 작품을 소장한 지 50년 만의 일이었다. 새 임자는 일본 다이쇼와 제지 명예회장 료에이 사이토였다. 낙찰 가격은 무려 8250만달러. 사이토는 사흘 뒤 르누아르 그림 한 점을 7810만달러에 사들여 세상을 놀라게 했다.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 '물랭 드 라 갈레트의 무도회' ( 1876년)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 '물랭 드 라 갈레트의 무도회' ( 187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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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토는 다이쇼와 제지의 부동산을 담보로 은행 융자를 받아 그림을 구입하고 주식과 다른 부동산으로 그 돈을 갚았다. 1980년대 말 일본의 토지 가격과 주식시장은 급등했고 다른 기업가들도 유사한 방식으로 그림을 사들였다. 이 시기 일본인들은 1만여점에 달하는 그림-주로 인상주의 회화-을 사들여 가격 상승을 유발하고 미술시장을 교란했다. 사이토의 반 고흐와 르누아르 구입은 그 정점이었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부자가 미술품 수집에 뛰어드는 것을 막을 순 없다. 하지만 수집가들의 경쟁적 투자는 미술품의 과도한 가격 상승으로 이어지고 미술관의 작품 구입을 어렵게 만들어 공익을 해치는 결과를 낳는다. '가셰 박사의 초상'이 웬만한 가격이었다면 이미 장기임대 형식으로 작품을 전시해오던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이 사들였을 것이다. 그랬다면 지금쯤 많은 사람들이 '가셰 박사의 초상'을 감상할 수 있었을 것이다.

사이토가 사들인 그림은 철저한 보안장치와 온도 조절장치를 갖춘 보관실로 사라졌다. 1991년 사이토는 세금 포탈 혐의로 관세청의 조사대상이 되어 또 한 번 세인의 주목을 끌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사이토가 지인들에게 "내가 죽거든 그림을 관에 함께 넣고 화장해 달라"고 부탁했다는 소문이 퍼져 예술애호가들을 경악시켰다. 사이토는 정부 고위층에게 뇌물을 준 혐의가 인정되어 징역 3년,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았고 1996년 여든 살로 사망했다.

1999년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은 반 고흐 초상화 특별전을 기획하면서 '가셰 박사의 초상'을 대여하려고 수소문했으나 소재를 알아내지 못했다. 사람들은 사이토가 했다는 괴상한 제안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1990년 사이토가 구입한 두 그림 중 르누아르는 익명의 스위스 수집가에게 팔렸다는 설이 유력하다. '가셰 박사의 초상'은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 없다. 누군가에게 팔았을 수도 있지만 아무 흔적이 없다.

사이토는 생전에 이 작품을 열심히 감상하지도 않았다. 경매회사로부터 그림을 넘겨받아 보관실에 넣기 직전 한 번 본 게 전부였을지도 모른다. 다이쇼와 제지의 대변인은 "초상화가 회사 소유물이 아니라 사이토의 개인 소유물이기 때문에 어디 있는지 알 수 없다"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그림을 관에 넣었다는 소문은 사실이 아닐 것이다. 누군가 소유하고 있지 않겠는가?"

예술사 저술가ㆍ경성대 외래교수

■이미혜는…
대학에서 예술사회사를 가르치면서 저술 활동을 하고 있다. 1990년대 말부터 예술이 사회경제와 어떤 관계를 맺으며 발전하는가에 대해 지속적 관심을 갖고 연구해 왔다. 서울대학교 불어교육과를 졸업했으며 같은 대학원에서 '한국의 불문학 수용사(1992년)'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프랑스 파리 4대학에서 수학하고 한국학술진흥재단 지원으로 박사후 과정 연구를 수행했다. 현재 경성대학교와 부경대학교에서 강의하고 있다. 예술사회사 분야 저서로 '예술의 역사(2004년)' '이미지의 시대(2011년)' '예술의 사회경제사(2012년)'가 있고 그 밖에 '이미혜의 그림 읽기(2016년)', 장편 소설 '사라진 서재(1999년)', 자녀 교육서 '아이를 살리는 공부, 아이를 죽이는 공부(2009년)'를 저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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