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r_progress

아시아경제 최신 기획이슈

[金요일에 보는 경제사]조선 건국과 멸망의 주역이었던 상인, 보부상

최종수정 2017.06.09 10:06 기사입력 2017.06.09 10:06

댓글쓰기

(사진=한국학중앙연구원)

(사진=한국학중앙연구원)

썝蹂몃낫湲 븘씠肄

[아시아경제 이현우 기자]유교를 국시로 삼았던 조선왕조는 상업을 말업(末業)이라며 천시했지만 정작 그 천시하던 상인들의 도움으로 왕조가 시작되고 유지됐던 사실은 잘 알려져있지 않다.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진 않지만 조선왕조의 건국부터 멸망까지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것이 바로 보부상(褓負商)들이다.

원래 보부상은 봇짐장수인 보상(褓商)과 등짐장수인 부상(負商)을 합친 말이다. 정확히 언제부터 이들이 역사에 등장했는지는 모르지만 보부상이란 전국적 조직을 갖추고 조선왕조 시대 내내 유통을 담당하는 세력을 갖춘 것은 고려시대 말기로 알려져있다.
이들이 조선시대 유통망을 장악하게 된 것에는 여말선초 정치적 격변기에 유력군벌이었던 이성계를 물심양면 도와준 정치적 커넥션이 숨어있다. 공식적으로는 이성계가 고려 전권을 장악하는 단초가 된 위화도 회군 때, 보부상들이 군량미를 대줬다는 내용이 남아있다. 실제로는 그 이전부터 이성계 일파에게 자금을 대주거나 정보책으로도 많은 도움을 준 것으로 추정된다.

보부상 접장임을 증명하는 도장 모습(사진=문화콘텐츠닷컴)

보부상 접장임을 증명하는 도장 모습(사진=문화콘텐츠닷컴)

썝蹂몃낫湲 븘씠肄

조선왕조가 건국된 이후, 이성계는 보부상들의 공로를 인정해 각종 행상권을 전담시켰으며 독점적인 전매권을 보장해줬다. 이에 따라 등짐장수인 부상은 어염(魚鹽), 토기, 목기, 목물(木物), 수철(水鐵) 등 주요 생필품에 대한 전매권을 부여받았고 보상은 필묵과 금, 은, 동 등 주요 사치품에 대한 전매권을 보장받았다.

이후 보부상들은 규모가 거대해져 이들을 공식적으로 관리하는 보부청(褓負廳)이란 관청이 마련됐으며 전국에 통일된 조직망이 형성됐다. 부보상단은 전국의 군·현을 묶어 각 지점의 관할단위로 삼아 임소(任所)를 두고 임소의 대표로 본방(本房) 1인을 선출해 사무를 총괄하게 뒀다. 또한 본방들 중 접장(接長)을 선출해 각 지점을 대표하게 했으며 한성부의 본부에서 접장들 중 다시 도접장(都接長)을 뽑아 8도 보부상 대표를 맡겼다.
이들 조직은 매우 강한 단결력을 생명으로 했으며 서양의 길드(Guild)와 비슷한 내규도 만들어 운영됐다. 주요 내규는 3가지로 어려울 때 서로 돕는 '환난상구(患難相救)', 언제나 같은 조직임을 강조하는 '조동모서(朝東暮西)', 일면식이 없더라도 보부상끼리 환자보호와 장례는 반드시 치러준다는 '병구사장(病救死葬)' 등이었다.

구한말 보부상들 모습(사진=문화콘텐츠닷컴)

구한말 보부상들 모습(사진=문화콘텐츠닷컴)

썝蹂몃낫湲 븘씠肄

보부상들은 전국적 네트워크를 배경으로 평화시에는 장사를 했고 전시에는 군량수송의 중요임무를 도맡았다. 임진왜란 격전지 중 한곳인 행주대첩에서 권율장군 휘하 조선군에게 양식을 조달한 것도 보부상들이었고 병자호란 때 청나라의 포위망을 뚫고 남한산성 안으로 군량을 수송한 것도 보부상들이었다. 이후에도 홍경래의 난, 병인양요 등 전쟁이 발생하면 늘 관군의 앞엔 보부상들이 있었다.

그러나 조선왕실의 어용상인이란 한계를 벗어나기 힘든 조직이기도 했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 진압 과정에서 왕실의 명을 받고 관군과 일본군의 앞잡이가 되기도 했고 독립협회 활동을 억제하기 위해 황국협회란 조직을 만들고 독립협회에 대한 테러를 일삼기도 했다.

구한말 보부상들의 역사적 활약상은 고종황제의 최측근 대신이었던 이용익(李容翊)이란 인물의 면면을 통해 살펴볼 수 있다. 보부상 출신으로 외척 민영익의 수하로 들어가 고종황제 부부의 신임을 얻었던 그는 다방면에서 활약했던 인물이었다.

보부상 출신으로 고종황제의 최측근 대신이 됐던 이용익 모습(사진=위키피디아)

보부상 출신으로 고종황제의 최측근 대신이 됐던 이용익 모습(사진=위키피디아)

썝蹂몃낫湲 븘씠肄

오랜 보부상 역할로 서울에서 전주까지 12시간만에 주파한 기록을 갖고 있던 그는 임오군란 당시 지방에 몸을 피했던 명성황후의 서신을 고종에게 보내는 연락통 역할을 했다. 또한 고종황제의 비자금 관리를 맡으면서 국가재정도 상당부분 관리했다. 이 과정에서 백성들을 수탈해 많은 비난을 받기도 했다. 1905년에는 오늘날 고려대학교의 전신인 보성전문학교를 설립, 교육사업에도 뛰어들었으나 을사조약 체결로 러시아로 이주, 독립운동에 투사하기도 했다.

이용익 외에도 수많은 보부상들은 일제의 침략에 항거하는 항일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일제강점기가 시작되자 보부상 조직은 일제에 의해 대부분 해체됐고 일부 보부상들은 일제에 협력하는 친일파로 돌아서기도 했지만 많은 보부상들은 일제강점기 동안 의병에 자금을 보태주거나 독립운동에 투사했다고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시기, 조선의 수많은 왕족들과 고관대작들은 나라를 파는데 앞장섰다. 하지만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신분제 굴레에 억압받던 상인들은 개인의 이익과 무관하게 나라를 구하고자 노력했다.


아시아경제 이현우 기자 knos84@asiae.co.kr

<ⓒ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간격처리를 위한 cla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