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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의 유래]현충일은 왜 항상 망종(芒種)과 겹칠까?

최종수정 2017.06.05 10:00 기사입력 2017.06.05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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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4년부터 시작된 현충일…1000전 여요전쟁 이후 지낸 전몰장병 제사에서 유래

낙성대 공원에 있는 강감찬 기마상(사진=두산백과)

낙성대 공원에 있는 강감찬 기마상(사진=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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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이현우 기자]매년 현충일인 6월6일을 전후로 24절기 중 아홉 번째 절기인 망종(芒種)일이 나타난다. 올해는 현충일 전날인 5일이 망종이다. 원래 망종은 벼나 보리 같이 수염이 있는 곡식의 종자를 뿌려야 할 적당한 시기라는 의미에서 붙은 절기였다.

현충일과 망종이 겹치는 것은 우연의 일치일까? 6월은 호국 보훈의 달이고 가까이 6.25 전쟁의 상흔이 남은 달이니 그냥 지나칠 수도 있는 일이지만 실제로 현충일이 망종과 겹치게 된 것은 1000년 전의 역사로 거슬러 올라가야한다.
고려 현종 5년인 1014년, 당시 거란과의 전쟁으로 수많은 장병들이 사망한 뒤 전몰장병들의 유해를 집으로 돌려보내 제사를 지냈던 것이 망종일이었다고 한다. 이후 나라를 위해 죽은 장병들의 제사를 이 시기에 주로 했으며 해방 이후 기념일에 포함됐다.

흔히 임진왜란에 비해 잘 알려지지 않은 전쟁이지만 여요전쟁은 임진왜란만큼이나 동아시아의 역사를 뒤바꾼 대전이었다. 고려왕조는 수도 개경이 함락돼 멸망 직전까지 몰렸었고 국왕인 현종이 전라도 나주까지 파천하는 등 최악의 전쟁이기도 했다.

낙성대 공원에 그려진 귀주대첩 관련 벽화(사진=낙성대공원)

낙성대 공원에 그려진 귀주대첩 관련 벽화(사진=낙성대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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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이 일어난 1011년, 당시 고려는 목종의 실정과 천추태후와 애인 김치양의 전횡으로 나라꼴이 말이 아니었다. 결국 정치적 혼란 속에 강조는 정변을 일으켜 목종을 폐위시키고 현종을 즉위시켰다. 이에 거란의 성종은 이것을 빌미삼아 40만 대군을 이끌고 고려로 진공, 고려를 아예 초토화시키고자 했다. 정변 직후의 혼란과 강조가 이끄는 고려 주력군이 대패하면서 고려 전역은 거란군의 침략에 쑥대밭이 됐다.
현종은 나주까지 몽진가는 동안 신하, 병사들이 죄다 도망가고 50여명의 금군만이 남아 그를 호송했다. 각지의 고을 아전들은 물론 도적떼까지 왕의 일행을 노려 나중에는 왕후와 비빈, 신하 몇 명 등 10여명만 남았을 정도로 처참한 도망길이 이어졌다. 현종의 한줌도 안되는 일행이 거란군에 쫓기기도 했으나 결국 탈출에 성공했고 한반도 깊숙이 들어왔던 거란군도 보급선의 한계로 물러가면서 1차 여요전쟁은 가까스로 마무리됐다.

거란군 침입로(사진=문화콘텐츠닷컴)

거란군 침입로(사진=문화콘텐츠닷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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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여요전쟁이 우리가 잘 아는 강감찬 장군의 대 활약 시기다. 1018년, 거란의 외척이자 명장인 소배압이 황제 친위대를 중심으로 최정예 기병 10만을 이끌고 고려를 침공, 개경까지 단번에 진군했으나 1차 침입 때와 달리 개경은 단단한 성벽으로 둘러싸인 요새도시로 변해있었다. 결국 군량부족으로 공성에 실패한 소배압은 퇴각을 결심하고 재빨리 귀주까지 북상했다.

그때까지 주력을 숨기고 거란군을 지속적으로 괴롭히던 강감찬 장군은 드디어 병력을 집결시켜 20만 대군으로 거란군을 전멸시키는데 성공했다. 이 여요전쟁으로 거란은 만리장성을 넘으려던 계획이 실패했고 국력이 크게 약화돼 훗날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에 압도당하는 처지로 전락한다. 고려는 이 전쟁 이후 200년 동안 전쟁없는 태평성대가 유지됐다. 현충일은 이 거대한 동북아시아 역사의 전환점에서 탄생한 의미있는 날이었다.


아시아경제 티잼 이현우 기자 knos84@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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