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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일 사형 당한 '박정희 시해' 김재규, 하루전 조카에게 한 말은

최종수정 2017.05.25 07:26 기사입력 2017.05.24 1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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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부끄러운 일 하지 않았다" …10.26 원인은 충성경쟁이 아니라, 유신과 김영삼 박해에 대한 반발 때문이라고 주장


1979년 12월 육군본부 계엄보통군법회의 재판정에서 피고인석으로 다가오는 가족에게 환한 표정을 지어보이는 김재규. '<격동의80년대>자료사진.

1979년 12월 육군본부 계엄보통군법회의 재판정에서 피고인석으로 다가오는 가족에게 환한 표정을 지어보이는 김재규. '<격동의80년대>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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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재규의 시 '장부한'

1973년 2월 국회의원 김재규는 '장부한(丈夫恨, 남자의 슬픔)'이란 한시를 남겼다.

눈 아래 험한 산, 흰 눈 덮였네
천고의 신성함을 누가 침범하랴
남과 북의 경계가 어디에 있는가
나라 땅 통일 못 이룬 것이 한스럽다


眼下峻嶺覆白雪 (안하준령복백설)
千古神聖誰敢侵 (천고신성수감침)
南北境界何處在 (남북경계하처재)
國土統一不成恨 (국토통일불성한)
눈 덮인 높은 산에 올라가 호연지기를 읊은 시다. 백설이 덮인 준령에는 오랜 세월의 신성한 기운이 서려 있다. 모두 하얀 산이니 거기 남과 북의 경계가 있을리 없다. 이것이 이 땅과 이 민족의 형국이 아닌가. 이런데도 역사의 과오와 어리석은 정치로 통일을 못 이루고 있으니 한스럽기 이를데 없다. 시상(詩想)이 호방하고 자연스러우면서도 울림이 있다.

1980년 5월24일 김재규 사형집행을 1면 톱으로 보도한 경향신문.

1980년 5월24일 김재규 사형집행을 1면 톱으로 보도한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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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를 쓴 김재규는 누구인가. 37년전 오늘(5월24일) 사형당한, 박정희 시해의 주인공이다. 김재규는 1979년 12월20일 육군본부 보통군법회의 대법정에서 열린 대통령시해사건 공판에서 강신옥 변호사에게 이 한시를 건네줬다. 어제인 23일 '박정희의 딸' 박근혜 전대통령이 법원에 출석해 첫 재판을 받았다. 역사는 기묘하게도 흐른다. 1979년 10.26 시해사건 이후, 김재규는 위험한 사고방식과 기이하고 변덕스런 행동방식을 지닌 희대의 살해범으로 자리매김되어 왔다. 이같은 평가는 박근혜 정권 때까지 정설로 유지되어 왔지만, 당시 역사의 흐름을 바꾼 인물로써 좀더 냉정한 평가가 필요하다는 의견이 나오고 있는 상황이다.


[이미지출처=연합뉴스]김재규

[이미지출처=연합뉴스]김재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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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0년대 한국 기업의 중동 진출을 주도한 건설장관

그는 경북 구미 출신으로 해방전 농림학교를 나와 교직생활을 했다. 국군 창설 때 육사 전신인 조선국방경비사관학교에 입교해서 1946년 2기생으로 졸업한다. 육군보안사령관, 제3군단장을 거친 뒤 중장으로 예편했고 5.16 때는 호남비료를 경영하고 있는 기업인이었다. 저 시를 짓던 때는 유신정우회 소속으로 제9대 국회의원이 되어 정치에 입문한 시절이다. 이후 그는 건설부 장관이 되어 한국기업의 중동진출을 주도한다. 중앙정보보장이 되는 건 1976년이었다. 1979년 YH무역 여공농성 사건, 김영삼 신민당총재 의원직 박탈, 부마(부산과 마산)항쟁을 겪으면서 대통령 경호실장인 차지철과의 갈등이 깊어진다. 1979년 10월 26일 그는 역사의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고 만다.

1979년 11월 30일 류택형 변호사는 남한산성 육군교도소에서 그를 만나 '육성진술'을 녹음해 공개했다. 그 녹음테이프에 따르면, 그는 차지철과의 충성 경쟁에서 밀리자 질투심에 사로잡혀 우발적으로 박정희를 살해한 것이 아니라, 1972년 유신헌법 선포 이후부터 그런 생각을 가져왔다고 했다. 전두환 정권이 그를 낙인찍은 '비열한 배신자' 프레임에 대한 항변이었다. 그가 결정적으로 시해를 결심한 것은, 김영삼 당시 총재에 대한 위해(危害) 지시 때문이었다고, 그의 동생인 김항규가 증언하고 있다. 김재규는 한국 민주화의 기둥이자 같은 김녕김씨인 사람을 내가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며 고민했다고 한다. 이 얘기는 10.26 이후 1심 2회 공판의 발언에서도 나온다.

1979년 12월 육본 보통군법회의 대법정 재판 때 강신옥 변호사에게 건네준 김재규의 시 '장부한'.

1979년 12월 육본 보통군법회의 대법정 재판 때 강신옥 변호사에게 건네준 김재규의 시 '장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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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영삼을 구하려 10.26을?

"각하, 김영삼 총재는 이미 국회의원으로서 면직됐습니다. 사법조치는 아니지만, 이미 그걸로써 본인을 처벌했다고 생각합니다."는 말씀을 드리고 곧이어 "각하 정치를 좀 대국적으로 하십시오." 그러면서 바로 총이 갔습니다.


경기도 관주시 오포읍 능평리 삼성개발공원묘원에는 김재규 묘역이 있다. 남한산성에 묘지를 잡아준 것은 보안사령부였다고 한다. 동생 김항규는 남한산성에 올라가 느티나무가 있는 곳을 보고 "여기를 파주시오"라고 말했다. 당시 김재규의 시신을 바꿔치기 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러나 동생은 목에 교수형 밧줄 자국이 있는 형의 시신을 확인했다고 말한다.

사형 당하기 하루전 동생 가족들은 김재규에게 면회를 갔다. 그는 아이들의 손을 붙잡고 이렇게 말했다. "큰 아버지는 세상에 부끄러운 일을 절대 하지 않았다. 나의 최후진술을 자자손손 전해다오. 그 속에 나의 진실이 있다." 그가 말한 최후 진술은 "나는 대통령의 참모인 동시에 대한민국의 고급관리다. 나라에 충성하고 국민에게 충성할 의무가 있지 않느냐. 이 나라에 자유민주주의를 회복시켜놓자. 소의에 속한 것은 다 끊었다. 대의를 위해 내 목숨 하나 버린다."라는 요지의 말이었다. 그러나 그의 말과 진실이 같은 것일지는 여전히 신중하고 엄중한 역사의 판단을 기다리고 있다. 그가 돌아간 날, 한국 현대사의 물꼬를 돌려놓은 '총부리' 뒤에 서있었던 그를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

아시아경제 티잼 이상국 기자 isomis@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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