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Dim영역

[충무로에서]소로와 어깨

스크랩 글자크기

글자크기 설정

닫기
인쇄 RSS
김도현 국민대 경영학 교수

김도현 국민대 경영학 교수

원본보기 아이콘
참으로 신기한 날들입니다. 욕망을 드러내고, 가진 것을 자랑하고, 정의를 조롱하는 이들이 힘을 얻어가는 것처럼 보입니다. 우리나라, 영국과 필리핀, 러시아, 그리고 마침내 미국도 말이지요. 역사는 뒤로 돌아가고 있는 것일까요? 제 기억도 삼십 년 전쯤으로 돌아갑니다.

제가 다닌 대학에서는 신입생이 제2외국어를 반드시 수강하도록 돼 있었습니다. 대학입학을 위해 열심히 외운 독일어 문법에 좀 질려 있던 터라, 뭔가 다른 방법이 없을까 고민하다가 '영산문 강독'이라는 교과목을 발견했습니다. 좀 높은 수준의 영어수업을 들으면 제2외국어 수업을 대체할 수 있다는 작은 글씨로 된 규정을 찾아낸 것이 자못 자랑스럽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그 수업은 결코 만만하지 않았습니다. 18세기와 19세기의 영산문(英散文)들을 읽는 것은 좀 멋스러운 일이긴 했지만, 사전에도 안 나오는 단어의 뜻을 받아 적느라 수업을 빠지기 어려웠습니다. 수업 빠지고 당구장과 술집을 전전하는 것이 일상이었던 1학년 녀석에게는 부담스러웠지요.
봄날이었던 것 같습니다. 진달래와 개나리, 그리고 무엇보다 최루탄 냄새가 뒤섞인 날이었으니까요. 나이 많은 교수님께서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Henry David Thoreau)아름다운 산문을 해석해주고 계셨습니다. 갑자기 뒤에서 한 학생이 손을 번쩍 들고, 교수님이 허락하기도 전에 질문을 던졌습니다. 법대 학생이었습니다. 교수님, 왜 우리 헌법은 시민불복종의 권리를 명문화하지 않은 겁니까?

그것은 물론 아주 난데없는 일이었습니다. 법이나 사회과학에 대해 거의 천치에 가깝던 제가 보기에도 이 수업에서 주고받을 대화는 아니었습니다. 교수님은 케임브리지대학(이름이 주던 권위라니!)에서 영문학을 공부한 분이었습니다. 셰익스피어를 읽을 때 혼자 몽환적인 표정을 짓곤 하셨으니 아주 낭만적이고 세상사 하나도 모르는 분임이 분명했고요. 그건 '법대교수에게 물어봐…'라는 답이 당연해 보이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교수님은 흘러내린 안경을 치켜 올리면서 소로우의 삶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습니다. 시민불복종에 대한 그의 열망과, 좌절과, 그리고 오두막에서의 삶을 말이지요. 교수님의 목소리에 뭔가 울컥하는 데가 있었습니다. 우리는 모두 그 이야기에 빨려 들어갔습니다.

제게 이것은 아주 기묘한 기억으로 남아있습니다. 질문한 학생은 더 질문을 이어가지 않았고, 우리와 함께 고개를 끄덕이며 그 긴 이야기를 듣고 있었습니다. 저는 교수님의 설명을 듣고서야 그 학생이 왜 소로우의 산문을 두고 시민불복종의 권리를 이야기했는지 알아차렸고, 부끄럽게도 그 날에서야 헌법전문을 처음으로 읽어보았습니다. 그리고 가끔 도무지 세상일에는 단 한 모금의 관심도 가지고 있지 않은 것처럼 보이던 그 노교수님이 그 날 보인 아주 특별한 눈빛을 기억해보곤 합니다. 어리석게도 이제 나이를 꽤 먹어서야, 지독한 낭만주의자가 견뎌야 했을 괴상망측한 세월을 짐작하게 됩니다. 대체 어떻게 버티어냈을까, 조금 궁금해하면서 말입니다.
우리에게 월든(Walden) 이라는 아주 낭만적이고도 아름다운 오두막 삶의 이야기로 잘 알려진 소로우는, 사실 뜨거운 마음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썼습니다.

사람은, 악에 저항하지 않고, 다른 문제에만 관심을 가지고 그것을 추구할 수 있다. 그러나 악에 전혀 관여하지도 않고, 선악의 문제에 일체의 관심을 두지 않고 자신의 계획대로 살아간다 하더라도, 실제로는 혹시 내가 다른 사람의 어깨 위에 올라앉아 있는 것은 아닌지 반드시 살펴보아야만 한다. 내가 올라앉은 그 사람은 나로 인해 자신의 계획을 추구할 수 없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그의 어깨에서 내려와야 한다.

그에게 소박한 삶은 이런 믿음을 실천하는 방법이었을 것입니다. 다른 이의 어깨를 누르면서 살지는 않겠다는 의지를 지킨 것일 테지요. 만약 지금 살아있다면, 남의 어깨에 올라 타 있으면서 어깨 내어준 이를 조롱해대는 사람들에게 소로우는, 그리고 그 때의 노교수님은 뭐라고 하셨을까 혼자 생각해보게 됩니다. 가을이 깊습니다.

김도현 국민대 경영학 교수







AD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함께 본 뉴스

새로보기

이슈 PICK

  • "편파방송으로 명예훼손" 어트랙트, SBS '그알' 제작진 고소 강릉 해안도로에 정체모를 빨간색 외제차…"여기서 사진 찍으라고?" ‘하이브 막내딸’ 아일릿, K팝 최초 데뷔곡 빌보드 핫 100 진입

    #국내이슈

  • "푸바오 잘 지내요" 영상 또 공개…공식 데뷔 빨라지나 대학 나온 미모의 26세 女 "돼지 키우며 월 114만원 벌지만 행복" '세상에 없는' 미모 뽑는다…세계 최초로 열리는 AI 미인대회

    #해외이슈

  • [포토] '그날의 기억' [이미지 다이어리] 그곳에 목련이 필 줄 알았다. [포토] 황사 극심, 뿌연 도심

    #포토PICK

  • 매끈한 뒷태로 600㎞ 달린다…쿠페형 폴스타4 6월 출시 마지막 V10 내연기관 람보르기니…'우라칸STJ' 출시 게걸음 주행하고 제자리 도는 車, 국내 첫선

    #CAR라이프

  • [뉴스속 용어]'비흡연 세대 법'으로 들끓는 영국 사회 [뉴스속 용어]'법사위원장'이 뭐길래…여야 쟁탈전 개막 [뉴스속 용어]韓 출산율 쇼크 부른 ‘차일드 페널티’

    #뉴스속OO

간격처리를 위한 class

많이 본 뉴스 !가장 많이 읽힌 뉴스를 제공합니다. 집계 기준에 따라 최대 3일 전 기사까지 제공될 수 있습니다.

top버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