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주변에는 놀랍도록 말귀가 밝은 사람이 몇 있다. 지복이라 여기는 동시에, 보고 배우기 위해 그들을 '임상'한다. 간추려보니, 우선 이들은 전반적으로 눈치를 보며 자랐다. 눈치란 일단 '불리'한 사람이 보는 것이므로 이들은 환영받지 못할 만한 어떤 이유를 지닌 채 성장한 경향이 있다. 스스로 기민하지 않으면 상황이 악화된다는 걸 알고 있어서 자연스럽게 맥락을 헤아려 버릇해온. 바꿔 생각해, 숨만 쉬어도 주변에서 어화둥둥 떠받드는 데 익숙했다면 적어도 이 능력이 길러지기엔 불리한 운명이었다 할 수 있다. 알 만한 분, 배운 분, 높은 분들이 외려 말귀에 영 소질이 없을 수 있다. 이때 ‘아랫것’들은 소통보다는 고통을 체험한다.
한 사람이 온 세상의 비극을 겪을 수 없어서, 문학이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훌륭한 문학은 독자를 자기연민의 우물 밖으로 꺼내준다. 제 손톱 밑 가시에 절절매며 살아온 사람에게, 이렇게 넓고 깊은 진창이 세상에 많으니 엄살은 조금만 떨라며. 말귀 밝은 이들이 개떡을 찰떡처럼 알아듣는 건, 말 한마디를 천 개의 결로 헤아리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이들은 보바리의 생과 조르바의 생을 함께 살면서 휘트먼의 생과 보들레르의 생도 건너본다. 그러고도 아직 못 살아본 생을 계속 궁금해한다. 궁금하니까 헤아리려 하고 자주 헤아리다 보니, 잘 헤아리게 된다.
그들은 비극을 알되 비극에 잡아먹히지 않는 사람들이다. 눈치를 능히 보지만 자신을 폐쇄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점점 귀해진다. 오늘날 눈치 보는 태도는 그다지 미덕이 아니며, 자기 비극만 막대한 사람은 차고 넘치기 때문이다. 비극을 딛고 당당해지라는 자기계발서는 호황이고 생의 명암을 시퍼렇게 비추는 문학은 불황인 걸까, 그래서.
이윤주 에세이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