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사회 인류에게 나타난 가장 창의적인 혁신가, 5년전 오늘 타계
그날의 잡스 지면을 축소하여, 기자 책상의 머리맡에 붙여놓았다. 까칠한 수염을 기른 대머리 잡스가 나보다 50센티 정도 승천한 채 내려다보는 거기서, 늘 글을 쓰고 생각을 하고 잠을 잔다. 잡스처럼 되겠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잡스가 걸어간 창의의 독보(獨步)는 마음 속에서 늘 꿈틀거리며 전진을 명령한다. 나는 잡스처럼 기업을 하는 것도 아니고, 기계를 만드는 일을 하는 것도 아니다. 미래지향의 새로운 산업을 개척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이제 뉴욕타임즈도 두 손을 들고 있는, 신문 언론에서 나는 내 남은 머리와 가슴과 뱃심을 모아 새로운 장(章)을 펼칠 야심을 불태운다. 노을에 서서 지구의 시간을 거꾸로 돌리려는 만용을 의욕이라 할 순 없다. 하지만 이 땅의 미디어에도 잡스가 필요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신문을 뒤집어, 이탈하고 있던 독자의 마음 속으로 매혹적인 무엇이 되어 재진입하는 꿈을 꾼다. 그것이 무엇인지, 아무도 모를 것이다. 창의는 그것이 눈앞에 나타나는 순간에라야 갈채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잡스'라는 영화를 뒤늦게 보았다. 감독은 잡스를 비사회적인 기인(奇人)으로 묘사하고 있다. 동료들과 충돌하고 양보없이 고집을 부리며 자신의 것을 표절한 경쟁사에 대해 증오를 불태우는 다혈질적인 천재. 그런 일면이 있었지만, 그게 그를 대표하는 특징일까. 하나의 삶을 그려내는 스토리텔링이란, 한 인간에 대한 심각한 오독이거나 부실한 이해이기 쉽다는 것을 여기서도 본다. 영화를 보면 스티브 잡스가 자신의 회사 주차장에 차를 대는 장면이 두번쯤 나온다. 그런데 장애인용 주차 장소에 서슴없이 파킹한다. 주차장이 텅 비었는데도 굳이 장애인 공간에 차를 세우는 까닭은 뭘까? 스스로를 장애인이라 생각한 걸까?
기존의 것을 되풀이하는 디자이너에게 '이 쓰레기를 날마다 만들어내면서 아직까지 여기 있는 이유는 뭔가'라고 묻던, 잡스의 삼엄한 질문은 내가 나에게 불쑥불쑥 묻는 말이다. 그는 자동차의 번호판을 달고 다니지 않았다. 차의 흰색과 번호판의 옅은 살색, 그리고 그 글자색이 전혀 어울리지 않아 그의 미감의 눈쌀을 찌푸리게 했다고 한다. 그런데 어떻게 번호판을 달지 않을 수 있었을까. 혹자는 잡스가 어떤 이유로 특권을 누렸을 거라는 짐작을 내놓고 있다. 그런데 현지에 살았던 어떤 사람이 이런 해답을 내놨다. "자동차를 6개월마다 새 차로 바꿔 등록하면 된다." 주 행정부에서는 신차에 대해 6개월간 번호판을 달지 않는 것을 허용하는 규정을 이용한 것이다. 이렇게 성가신 일을 감수하면서까지 스스로의 스타일을 고집하는 그 성격이, 애플의 제품들에 숨어들어가 있는 셈이다.
오늘 잡스가 눈 감은지(10.5) 5년째 되는 날이다. 국내에선 삼성의 라이벌로 기억되는 기업의 CEO였지만, 그를 기리는 것은 그의 마음 속에 불타고 있던 불멸의 창의와 선구적인 용기를 기리는 것이다. 고개를 들어 그 미소를 우러른다.
이상국 기자 isomis@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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