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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진이 콤플렉스②]눈먼 어머니를 버린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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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섬 스토리 - 황진이를 숨막히게 했던 '예쁨'의 감옥… 난 사내의 여자가 되고싶지 않다

[아시아경제 이상국 기자]

‘얼굴에 화장도 하지 않고 담담한 차림으로 자리에 나오는데, 천연한 태도가 국색(國色)으로서 광채가 사람을 움직였다.’ (이덕형)
중국의 사신조차도 이렇게 말했다. “너의 나라에 천하 절색이 있구나.”(이덕형)
“(그녀가 있으면) 방안에서 때로 이상한 향기가 나서 며칠씩 없어지지 않았습니다.”(이덕형)
‘성장하자 절색의 미모를 갖추었다.’(김택영)
이런 구체적인 대목이 아니라 하더라도, 황진이는 여러 가지 에피소드의 등장인물들을 대부분 쩔쩔 매게 만들 만큼 뛰어난 미모와 매력을 갖추고 있었다. 이러한 점은 황진이를 출세하도록 만들기도 했지만, 그녀의 삶을 왜곡하고 혼란스럽게 하기도 했다. 아름다운 여자로 살아간다는 것은, 뜻밖에 그녀가 주체적으로 살고싶은 희망들을 좌절시키고 오로지 욕망의 대상으로만 인식되게 하는 불행에 놓여지는 것이기도 하다.

김기덕 감독 영화 '아름답다'(2008)

김기덕 감독 영화 '아름답다'(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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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랍게도 영화 감독 김기덕이 ‘황진이 콤플렉스’를 2008년에 내놓은 작품에서 정확하게 표현해내고 있다. ‘아름답다’라는 제목의 영화가 그것이다. 연예인으로 오해를 받을 만큼 예쁘게 생긴 한 여인의 이야기다. 그녀는 수많은 남자들의 ‘작업’에 시달리는데 그중 한 명으로부터는 치명적인 성폭행을 당한다. 경찰서에 가니 이번엔 경찰관이 따라붙고, 다쳐서 병원에 가니 의사가 추근댄다. 길에서 쓰러지니 남자 행인 수십명이 서로 돕겠다고 덤벼든다. 한 사내의 일방적인 사랑에 죽음까지 맞게 되는데, 죽은 뒤에까지 예쁜 시신을 탐내는 남자들이 서성거린다. 풍자이기도 하지만, 김기덕의 감관에 잡힌 ‘예쁨’의 비극은, 황진이를 숨막히게 했던 공기들과 닮아있다.
황진이 콤플렉스를 읽어가기 위해서는, 그녀의 어머니 진현금(陳玄琴)을 만나야 한다. 현금에 관한 이야기를 소개하고 있는 사람은 이덕형과 김택영, 그리고 허균이다. 앞의 두 사람은 현금의 에피소드를 소개하고 있고, 허균은 황진이를 맹녀(盲女)의 딸이라고 말하고 있다. 양쪽의 이야기를 합치면 현금이 앞을 못보는 소경이 된다. 그런데 이덕형과 김택영은 왜 이 중요한 팩트를 놓쳤을까. 특히 이덕형의 글을 보면, 그녀와 맹인이 아니라는 심증을 갖게 한다.

어미 현금이 매우 자색(姿色)이 있었다. 열여덟 살 때 병부교 다리 밑에서 빨래를 하고 있었는데 옷차림이 화려하고 얼굴이 잘난 한 남자가 다리 위에 서서 현금에게 눈길을 보내며 혹 웃기도 하고 혹 손가락으로 가리키기도 하니 현금의 마음이 움직였다. 그런데 그 사람이 문득 사라지고 보이지 않았다. 해가 서산으로 기울고 빨래하는 아낙들이 모두 흩어졌다. 그러자 그 사람이 또다시 다리 위에 나타나 기둥에 기대어 노래를 불렀다. 노래를 끝내자 물을 청하였다. 현금이 표주박에 물을 떠서 바쳤다. 그 사람이 반쯤 마시고 웃으면서 돌려준 다음 다시 말하기를 “그대도 시험 삼아 마셔보라” 하였다. 마셔보니 술이었다. 현금이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이로 인하여 두 남녀는 인연이 되어 정을 통하였다. 이렇게 해서 진랑(眞 娘)이 태어났다. <‘송도기이’ 중에서>

다리 위의 남자가 웃고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것을 현금이 어떻게 알았을까. 주위에서 말해줬다면 그런 내용들이 들어가 있어야 할 것이다. 이덕형의 진술이 맞다면 허균이 잘못 알았을 수도 있다. 허균은 누이 허난설헌이 죽었을 때 그녀의 시를 모두 외워 유고시집을 낼 정도로 기억력이 비상했던 사람이다. 그런 그가 근거도 없이 황진이의 어머니를 맹인이라고 했을 리는 없다고 봐야 한다. 이 두 사람의 진술이 둘 다 틀리지 않기 위해서는, 진현금이 다리 위의 사내와 통정을 할 때에는 시력이 정상이었으나, 이후에 어떤 이유로 앞을 못보게 되었어야 한다. 허균이 굳이 황진이를 ‘맹녀의 딸’이라고 지칭한 것은, 당대에 그런 인식을 부각시키는 행동이나 사건들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즉 ‘매우 자색(姿色)이 있었’던 진현금은 황진이를 낳고난 뒤에 눈이 멀어버렸다. 황진이는 눈 먼 어머니의 고통을 어린 시절부터 보고 자랐다. ‘다리 위의 사내’로 나오는 황진이의 아버지에 대해 진술하고 있는 사람은 김택영이다.

‘황진이는 중종 때 사람으로 황진사의 서녀이다. 그의 어머니 진현금이 병부 다리 아래에서 물을 먹다가 감응하여 황진이를 잉태했다. 황진이를 낳자 방안에 기이한 향기가 사흘 동안 풍겼다.’ <‘송도인물지’ 중에서>

어머니 진현금의 신분에 대해서 알 수 있는 정보는 별로 없다. 황진이가 서녀라고 말하는 것을 볼 때, 진사의 첩이었다는 추측을 할 수 있다. 진현금 또한 기생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다리 위에서 러브콜을 했던 사내는 황진사인 셈이다.

여기서 정황들을 종합해보면 황진이가 기생이 될 수 밖에 없었던 조건들이 짚인다. 즉 기생 진현금은 황진사 집에 첩으로 들어가 살다가, 어떤 병이나 사고로 눈이 멀어, 그 집에서 쫓겨나게 된다. 이때 현금은 어린 딸 진이를 안고 나와 기방(妓房)에 몸을 의탁한다. 황진이는 자라면서 눈 먼 어미가 괄시당하고 고통받는 것들을 늘 보면서 자란다. 그녀의 눈이 되어주려 애쓰지만 마음만큼 되지는 않는다. 자라면서 황진이는 주위에서 찬사를 듣는 미모의 여인이 되어간다. 그렇지만 그녀는 어머니의 불행을 가슴에 먼저 새겼기에 그런 찬사가 오히려 덧없게 느껴진다. 예쁘다는 이유로 다리 밑에서 간택된 어머니는, 어느날 갑자기 눈이 멀자 버려졌다. 기방에 돌아왔으나 기생 행세는 커녕, 거문고를 더듬으며 눈칫밥을 먹고 있다. 한겹 살갛이 예쁘다는 게 도대체 뭐란 말인가. 사랑? 그 따위가 다 뭐란 말인가. 그런 질문들이 목울대를 은근히 씰룩이고 있었다.

황진이는 미모 따위에 의지하지 않기로 했다. 예뻐서 나쁠 거야 없지만 그것에 인생을 걸지 않기로 했다. 어머니처럼 되고 싶지 않았다. 운 좋게도 그녀는 노래와 거문고 솜씨가 뛰어나 천재라는 소리를 듣고 있었다. 기생이지만 선비들이 읽는 경전과 역사서를 몰래 탐독했다. 당시(唐詩)를 공부하며 감(感)을 키웠다. 그녀는 골이 텅빈 미녀가 되어 고객들을 향해 웃고 춤추는 존재가 되고싶지 않았다. 그 고객들에 대해 은밀히 경쟁 의식을 키우고 있었다.

어쩌면 그 고객은 바로 ‘아버지에 대한 증오’같은 것이기도 했을 것이다. 예쁨 만을 탐하는 남자, 그것은 아버지의 그림자였다. 그들에게는 인간적 관계로서의 ‘여자’가 있는 게 아니라 성적 욕망과 우월을 과시하는 허영으로서의 대상인 해어화(解語花)가 있을 뿐이었다. 황진이는 예뻐지면 예뻐질 수록, 그 예쁨이 만들어내는 흥분과 소음들을 경멸하고 있었다.

어머니는 기생으로서는 이례적으로 자신에게 성을 붙여주었다. (원래 기생은 동성(同姓)의 사내들이 거리낌이 있을까봐 성을 밝히지 않는다.) 어머니로서는 진사의 딸이라는 자부심을 표현하고 싶었겠지만 황진이는 그 ‘황’ 한 글자가 무척이나 싫었다. 그래서 그 ‘황(黃)’의 그림자를 닦아내서 ‘완전한 황금빛 달’로 자신을 만들고 싶었다. ‘명월(明月)’ 속에 깃든 흑점같은 아버지.






이상국 기자 isomis@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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