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섬의 '스토리를 찾아서'
8.15 해방은 그에게는 더욱 가련한 시련이었다. 공산주의자에게 가산을 모두 빼앗기고 아우와 함께 노점 책장사를 했다. 돈을 모아 ‘건국서사’라는 책방을 차렸다. 46년 3월13일 함흥 학생시위 때 근처에 있다가 경찰에 붙잡혀 곤욕을 치렀다.
27세의 한하운은 한 해 동안 참으로 많은 일을 겪는다. 47년 4월 공산주의 체제의 전복을 꿈꾸던 아우가 체포되었을 때 그도 함께 원산형무소로 끌려간다. 이후 나병 악화로 병보석을 나온다. 그를 사랑하던 여인 R은 함께 당국에 끌려가고 없었다. 그는 나병 치료약을 구하기 위해 38선을 넘는다. 대구의 애락원, 부산의 상애원을 찾아갔으나 구하지 못하고, 대구 동산병원에서 ‘다이아송’ 60알, 서울 천우당 약방에서 ‘대풍자유’ 3병을 산다. 6월에 다시 월북해서 고향으로 돌아갔는데 불심검문에 걸려 병보석을 어기고 남한에 다녀온 죄로 원산의 어느 건물에 갇힌다. 8월 그는 보초를 속여 그곳을 탈출하여 다시 월남한다.
53년 전쟁이 끝나가는 무렵인 6월30일 시집의 재판(再版)이 나왔다. 이 두 번째 판이 나오면서 논란이 일었다. 전쟁 전과 전쟁 후의 분위기가 달라졌기 때문이다. 문제가 된 시는 ‘행렬’이라는 시였다.(초판에서는 ‘데모’라고 되어 있었으나 재판에서는 고쳐서 나갔다.) 이 시는 ‘뛰어들고 싶어라/뛰어들고 싶어라//풍덩실 저 강물 속으로/물구비 파도소리와 함께/ 만세소리와 함께 흐르고 싶어라//물구비 제일 앞서 핏빛 기빨이 간다...’로 시작되는데 ‘핏빛 기빨’이 적기(赤旗)를 의미한다는 논란을 불렀다. 8월에 한 주간지(‘신문의 신문’)에서 ‘문둥이 시인 한하운의 정체’라는 타이틀로 그를 문화빨치산이라고 공격하는 글을 실었다. 그 잡지는 ‘한하운(韓何雲)’이란 뜻이 한국이 어찌 하여 뜬구름이 됐는가라는 의미라고 분석하고 이 시인은 실제 존재하지 않는 가공의 인물이라고 주장했다.
10월15일 서울신문 편집국에 허름한 옷차림의 남자 하나가 나타났다. 사회부 기자였던 오소백은 그가 한하운임을 알아보았다. 가상 인물이라던 그가 버젓이 실존하는 인물로 신문사에 찾아온 것이다. 시인은 이곳에서 즉흥적으로 시 한수를 썼다. 그것이 그의 대표작이 된 ‘보리피리’였다. 서울신문은 그의 시와 근황에 관한 기사를 크게 보도했다.
그러자 평화신문의 이정선은 한하운을 “유물변증법적 창작방법을 천부적으로 체득한 공산주의 지하운동자의 천분을 지닌 간사한 인물로 볼 수 있다”고 단정했다. “간밤에 얼어서 손꼬락 한 마디 머리를 긁다가 땅 우에 떨어진다”는 구절은 당국이 ‘문둥이’와 ‘빨갱이’를 판별하지 못하도록 하는 농간이라고 주장한다. 가을에 ‘보리피리’라는 시를 쓴 것도 이상하며 나환자의 이름을 빌려 적색선동을 조심스럽게 조종하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그는 ‘한하운 시초’ 재판은 문화빨치산의 남침 신호로 볼 수 밖에 없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대구 출신의 이정선은 국도신문 기자와 태양신문 문화부장, 소년태양 편집국장을 지낸 언론인이었다.
이 문제는 국회에서 국무총리를 상대로 질의하는 사태로까지 발전한다. 10월 19일 제17회 임시국회에서 최원호 의원은 한하운 시집의 출판을 공산주의자들의 선전전쟁으로 규정하고 나선다. 이후 경찰은 부평으로 형사를 파견해 한하운의 뒷조사를 했다. 11월 21일 치안국장 이성주는 기자들에게 한하운은 공산주의자가 아니며 시집 내용도 좌익을 동정하는 것으로 인정할 수 없다고 말했다. 정음사 사장 최영해도 조사를 받았으나 사상이 온건한 사람이며 공산주의자가 아니라는 것을 확인했다고 말한다. 치안국장은 “우리는 현재 그 사람의 사상이 어떤가를 검토해야지 과거 공산주의자였다는 것을 끄집어낼 필요는 없다”고 유연한 입장을 취해 논란의 종지부를 찍었다.
한하운은 1959년 나병 음성으로 진단받아 사회에 복귀하고 한미제역회사를 설립해 회장이 된다. 60년에는 출판사 무하(無何)문화사를 설립한다. 73년 전남 고흥군 도양면 소록도에 시비가 세워지고 75년 3월 인천에서 간경화로 숨진다. 나는 나는 죽어서 파랑새 되어 푸른 하늘 푸른 들 날아다니며 푸른 노래 푸른 울음 울어예으리 나는 나는 죽어서 파랑새 되리. 나병의 천형을 앓으며 자신과 같은 불우한 사람들을 위해 치열하게 살았던 한하운은 75년 3월 인천에서 뜻밖에도 나병이 아닌 간경화로 55년의 파란많은 생을 마감한다.
‘죄명은 문둥이.../이건 참 어처구니없는 벌이올시다’(시 ‘벌(罰)’의 한 구절)라고 절규한 한하운은, 전후의 히스테리 속에서 참 어처구니없는 이념적 형벌까지 덤터기를 쓴 셈이다.
이상국 기자 isomis@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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