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는 고개 숙이고 아래는 발로 밟기 '자전거 반응'을 아십니까?
[아시아경제 조민서 기자]'갑(甲)과 을(乙)'이란 말은 원래 계약서 상의 용어다. 갑은 계약의 주체가 되어 금액을 지불하는 사람을, 을은 주로 용역이나 상품, 서비스를 제공하는 자를 지칭한다. 계약 당사자를 순서대로 지칭하는 용어에 불과했던 '갑과 을'은 현재 한국 사회에서는 상류층-하류층, 가진 자-못 가진 자를 구분하는 용어가 되어버렸다. '땅콩회항 사건', '백화점 모녀 사건', '아파트 경비원 사건' 등 일련의 사건들을 거치면서 아예 일부 공공기관에서는 행정 문서에서 '갑을' 용어를 퇴출시키기까지 이르렀다.
그렇다면 언제부터 우리 사회에서 '갑'과 '을'의 관계가 존재하게 된 것일까. 신간 '갑질사회'의 저자이자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최환석(47) 씨는 "대부분의 인류 역사에서 계급과 위계로 인한 차별과 불평등은 언제나 극심했으며 소수 기득권의 갑질은 당연한 일로 치부됐다"며 "이러한 일은 역사를 따라 반복되면서 대부분의 백성들이 항상 피폐한 삶을 살게 한 동인이 됐다"고 지적한다. 즉, '갑질문제'가 현 사회만이 안고있는 고질적인 병폐가 아니라 신라·고려·조선 등 역사를 거슬러 되풀이되고 있는 현상이라는 것이다.
고구려는 태조왕 때 활발한 대외정복 활동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했다. 이로써 지배 집단의 경제력은 강해졌지만, 계층분화가 심해져 농민들의 생활고는 더욱 극심해졌다. 백성들의 불만이 커질수록 왕은 왕권을 더욱 강화하고 경쟁 세력을 약화시키려는 시도를 하게 된다. 결국 4세기 후반 소수림왕은 국가통치 기본법인 율령을 반포하고, 중앙집권 체제를 확립한다.
문제는 중앙집권 체제 그 자체에 있다기보다는 지배층이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한 수단으로 이를 사용한다는 데 있다. 배타적인 사회를 만들어 권력을 독점해 세습한다는 점에서 중앙집권 체제의 확립은 '독재'의 또 다른 모습이라 할 수 있다. 폐쇄적인 권력구조는 정치권의 부패를 낳고, 착취적인 경제구조는 민심의 이반을 불러일으킨다. 중앙집권체제로 전성기를 맞이한 고구려는 곧 내리막길을 걷다 신라에 의해 정복당한다. 이러한 패턴은 백제와 신라, 고려와 조선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일상생활에서 대학생들이 자주 쓰는 말이 "수능시험을 망쳐서..."이다. 하지만 이 말에도 "자신이 원래는 이 위계에 속할 사람이 아닌데 실수로 속하게 됐으니 나를 차별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호소가 담겨있다. 자동차 딜러들을 대상으로 한 실험에서도 소수 인종이나 종교를 가진 딜러들이 오히려 손님들을 차별한다는 결과도 나왔다. 자신의 사회적 처지에 대한 불만으로 다른 사회적 약자를 차별하는 데 적극적으로 나서는 것이다.
이 모든 현상은 '자전거 반응'이란 말로 설명할 수 있다. 경주용 자전거를 탈 때 상체를 숙이고 페달을 밟는 모습이 마치 권위에 고개 숙이고 낮은 계층을 학대하는 모습과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저자는 "계층화가 심한 불평등 사회일수록 하위계층에 대한 편견이 증가하고 그들에게 우월감을 표시함으로써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유지하려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한다.
특히 전작 '나는 한국경제보다 교육이 더 불안하다(2013)'에서도 한국의 교육 문제에 깊은 관심을 보였던 저자는 이번 책에서도 왜곡된 교육 현실이 현재의 '갑을사회'와 어떠한 상호작용을 하고 있는지 날카롭게 분석한다. "인간의 한 단면만 보고 그 사람을 판단해버리는 탈인간화의 과정"이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는 분야가 교육이라는 지적이다.
결국은 우리 사회의 차별과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해 전 사회가 나서서 협렵해야만 갑질사회의 폐해를 바로잡을 수 있다. 사회문제를 내버려둔 채 단순히 갑질하는 사람을 비판하고 공론화시키는 것으로 해결하려고 하면 오히려 갑질이 더 교묘해지거나 눈에 띄지 않는 방향으로 진화해갈 수 있다.
저자는 기득권층의 횡포와 폭력이 되물림되지 않도록 하는 가장 바람직한 해결방법으로 '선거'를 든다. 선거에서 대중은 대중의 이익을 증가시켜줄 사람들을 선택하기만 하면 된다. 얼핏 당연한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한국사회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쉽지 않은 일이기도 하다. "정치를 외면한 가장 큰 대가는 저질스러운 인간들에게 지배당하는 것이다."(플라톤)
(갑질사회 / 최환석 / 참돌 / 1만4800원)
조민서 기자 summer@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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