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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을 위한 행진곡'의 비밀…'핏빛 화려한 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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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군 윤상원과 들불야학 박기순의 영혼결혼…그리고 백기완, 황석영, 김종률의 인연

광주의 광산구보 표지에 실린 윤상원

광주의 광산구보 표지에 실린 윤상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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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5월 18일 10시. 광주 북구 운정동 국립 5.18 묘지. ‘임을 위한 행진곡’이 연주되자 대통령이 일어나 태극기를 흔들었다. 현직 대통령으로는 이 기념식에 참석한 것은 5년만이었다. 2014년 같은 날 이곳에 대통령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정홍원 총리가 참석해 기념사를 했으나 분위기가 서늘했다. 야당 대표와 시민대표들이 앉을 자리가 비어있었다. 작년 6월 국회가 발의한 ‘임을 위한 행진곡’ 5.18기념식 공식곡 지정 결의안을 정부가 거부한데 대한 항의표시였다. 5월단체들이 내놓은 이 노래의 기념식 제창요구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 노래는 5.18 기념식이 시작된 1997년부터 2008년까지 공식 행사곡으로 불려졌으나, 2009년에 금지됐다.
이 노래가 도대체 어떤 의미가 있기에, 오늘 벌어진 중요한 정치적 갈등의 중심에 선 것일까.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 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
동지는 간데 없고 깃발만 나부껴
새 날이 올 때까지 흔들리지 말자

노래의 1절 가사이다. 이 곡의 노랫말은 원래 백기완의 시 ‘묏비나리’에서 따온 것이라고 한다. 그 차용한 대목은 이렇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
싸움은 용감했어도 깃발은 찢어져
세월은 흘러가도
구비치는 강물은 안다
벗이여 새날이 올때까지 흔들리지 말라
갈대마저 일어나 소리치는 끝없는 함성

묏비나리는 산신제의 위령곡(영혼을 달래는 노래)라고 볼 수 있다. 이 시를 작가 황석영이 노랫말로 만들고 김종률이 작곡하여 ‘임을 위한 행진곡’으로 만들었다. 이 노래를 제작한 것은 1980년 12월이었으나, 이것이 대중에게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1982년 제작된 음반 ‘넋풀이-빛의 결혼식’에 수록되면서였다. 이 노래굿은 어떤 기막힌 부부에게 바치는 비나리였다. 1980년 5월27일 사망한 신랑 윤상원, 1978년 12월 27일 사망한 신부 박기순. ‘임을 위한 행진곡’은 두 사람의 영혼결혼식에 헌정된 노래였다. 1982년 2월20일, 광주 망월동 묘역에는 두 사람의 친지들이 참석한 가운데 결혼식이 있었다. 그때 ‘신랑도 신부도 끝내 보이지 않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도 슬픈 이 결혼식은 우리 역사에 한곡의 노래를 남깁니다’면서, 이 노래가 불려졌다. 이 노래를 작곡한 김종률은 윤상원의 전남대 후배이다.

영화 화려한 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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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랑 윤상원은 누구이던가. 영화 ‘화려한 휴가’에서 배우 김상경이 열연했던 주인공의 실제인물 바로 그이며, 임철우의 소설 ‘봄날’에서 시민국 대변인 윤상현으로 나오는 사람이기도 하다. 또 1996년 광주MBC다큐의 ‘시민군 윤상원’에서 재조명된 인물이다. 그는 5.18 항쟁지도부의 대변인 역할을 했으며 최후의 저항을 하다가 5월27일 새벽 옛전남도청에서 복부에 총상을 입고 숨을 거둔 민주화 열사이다.

윤상원의 삶을 간단히 짚어보자. 그는 전남대 문리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1978년 1월에 주택은행에 입사를 한다. 그러나 그해에 사표를 내고 광주로 돌아와 한남플라스틱의 일용노동자로 취업한다. 이 무렵 광주지역 최초의 노동야학인 ‘들불야학’에 참여하게 된다. 이 야학은 1978년 7월에 1기가 입학했고 1981년 7월에 4기가 졸업한 뒤 해체되었다. 야학을 개설하는데 중심역할을 한 사람은 전남대 휴학생인 박기순이었다. 윤상원은 박씨의 권유를 받고 야학운동에 뛰어들었다. 그런데 1978년 크리스마스 날 박기순이 연탄가스로 숨지는 사고가 일어난다. 야학이 흔들리려 할 때 윤상원이 그 중심이 되어 다시 일으킨다.

1980년 5월 광주에 민주화운동이 들불처럼 타올랐을 때, 윤상원은 그 투쟁의 기획자이며 실행자이며 활동가였다. ‘광주시민 민주투쟁 회보’의 초안을 그가 만들었으며, 19일 오후 광주 시내 곳곳에 들불야학 교사들이 들고나가 뿌렸다. 시민군의 선언문을 제작하고 ‘투사회보’를 9회까지 만들어 배포했다. 내외신 기자들을 모아놓고 항쟁의 의미를 역설한 것도 그였다. 그의 죽음은 5.18 항쟁의 담대하던 ‘심장’이 멎은 것이었다. 그는 계엄군이 진압해오기 직전 도청에 있던 중고생들과 여대생들을 귀가시키면서 이렇게 말했다.

“너희들은 이 모든 과정을 지켜보았다. 이제 너희들은 집으로 돌아가라. 우리들이 지금까지 한 항쟁을 잊지말고 후세에도 이어가길 바란다. 오늘 우리는 패배할 것이다. 그러나 내일의 역사는 우리를 승리자로 만들 것이다.”

윤상원의 기억이 담긴, 그리고 그의 아내 박기순의 뜻이 담긴, 또한 광주 민주화운동의 피얼룩이 이뤄낸 성취의 의미가 담긴 노래가 바로 ‘임을 위한 행진곡’이다. 이 노래를 제창하는 것은, 윤상원이 말한 ‘지금까지 한 항쟁을 잊지말고 후세에도 이어가길 바란다’는 그 처절한 당부를 실천하는 것이며, 역사의 뼈저린 교훈을 상기하는 일이다. 노래 한 곡 속에 숨어있는 두 죽음과 수많은 죽음들이 버티며, 진혼을 요구하는 거기에, ‘님을 위한 행진곡’ 갈등의 본질이 있다.



이상국 편집에디터 isomis@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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