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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낱말의 습격]지름신의 진짜 의미(42)

최종수정 2020.02.12 10:26 기사입력 2014.05.16 06: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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낱말의 습격

낱말의 습격


지름신이 뭐냐, 혹은 지름신이 반지름신의 두 배 크기냐, 따위의 질문이라면, 별로 재미없다. 인터넷에 떠도는 허접한 유행어들에 토를 달아, 기민한 유식자랑을 할 생각은 아니지만, 지름신이란 말에는 뭔가 통증같은 게 있다. 현기증이 더 가까울까.

지름신이 강림하셨다. 지름신이 다녀가셨다. 이런 용례들을 살피면 이 낱말의 뒤에 붙은 신은 神인 듯 하다. 지름은 무슨 뜻일까. '지르다'의 명사형으로 보인다. '지르다'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있다. 첫째는 에두르지 않고 가장 짧은 길로 직행하는 것을 말한다. 지름이나 지름길 따위의 말은 여기서 나왔다. 둘째는 속어로 쓰이는 '골 지르다' '염장 지르다'의 뒷부분이다. 세째는 '불을 지르다'라고 할 때의 '지르다'이다. 네째는 '소리를 지르다' '고함을 지르다' 할 때의 지름이다. 다섯 번째는 '저지르다'의 의미다. '일을 지르다' '사고를 지르다' 할 때의 그 '지르다'이다. 지름신의 '지름'은 다섯 번째 의미를 근간으로 하면서 다른 의미들을 모두 포함하는 점이 특징이다.
지름이란, 해서는 곤란하거나 뒷수습이 어려운 일을 과감하게 혹은 무모하게 저지른다는 의미를 담는다. 그 지름에는 결행의 속도가 필요하고(직행), 나중에 골 지르는 문제들이 발생하고, 그 문제들은 검불에 불지른 것처럼 활활 타오르기 십상이며 겁은 나지만 악으로 깡으로 질러버리고 싶어진다. 그래서 저지르는 게 바로 '지름'이다. 주로 '지름'은 무리한 구매 행위를 의미하는 말로 쓰인다.

지름은 물건을 사고 싶은 욕망의 크기가 비대해있는데 비해, 그것을 구매할 수 있는 능력이 따라주지 못하는 비극을 탑재한 무리수이다. 세상의 많은 광고들과 물건들은 지름을 충동질한다. 온갖 좋은 말과 달콤한 권유로 욕망을 키워놓는다. 그런데 내가 구매할 수 있는 물건은, 늘 욕망의 눈금에서 턱없이 모자란다. 물건 값과 욕망 사이즈의 갈등을 일시적으로 해결해주는 신비한 마법이 있는데 그게 신용카드다. 젊은 층의 카드빚이 심각한 사회 문제로 부상한 것은 바로 저 지름신이 강림하신 탓이다. 카드로 일단 긁고 생각하자. 그게 지름신의 메시지다.

소비사회를 풍자하는 키워드 중에는 물신(物神)이란 말이 있다. 신은 형이상학적이고, 정신이나 영혼에 관여하는 것이어야 할 텐데, 소비사회에서는 물건이 신격화된다. 신도 눈에 보이는 것, 감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물건을 위해선 정신의 긍지 따위는 버려도 된다고 물신은 말한다. 물신주의는 돈으로 살 수 있는 모든 물건들에 대한 숭배이며, 그것 아닌 다른 가치에 대한 경멸이다. 그런데 지름신은 그 물신이 출산한 기형아다.
물신은 물건 자체에 신격을 부여했지만 지름신은 물건을 사고싶은 '충동'에 신격을 부여했다. 견물생심(見物生心)에 한없이 나약해지는 인간성은, 그 동안 도덕적 비난을 받아왔지만, 이번에 지름신으로 승격함으로써 '무절제' 또한 신성한 것이라는 인상적인 결론에 이른다. 물건을 산 것은 '내'가 아니며, 나의 '참을 성 없음'이나 "대책 없음"이 아니라, 바로 거부할 수 없는 신의 뜻이라는 의미를 슬쩍 담아, 책임을 피하는 맛을 즐긴다.

지름신은 전방위적인 사물의 유혹에 둘러싸인 인간의 번뇌를 적실하게 그려낸다. 물신은 이제 지름신의 이름으로 인간의 내면까지 파고 들었다. 스스로의 결정에 의해 무엇인가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신내림같은 '충동'들이 인간의 행위를 이끈다. 지름신에서 나온 갈래말인 '지르가즘'은 사고 싶은 충동 대로 마구 지를 때의 후련한 기분을 절묘하게 포착한다. 오르가즘 뒤에 오는 기묘한 후회와 허탈감이 지르가즘에도 그대로 작용한다. 한번 질러봐? 잠깐의 황홀 뒤 길게 죽어나기, 그게 문제의 핵심이다.

지름신은, 사자 아가리 만한 유혹와 쥐꼬리 만한 인내 중에서 누가 더 세지? 하는 수수께끼를 내놓고는 잡아먹으려고 기다리고 있는 스핑크스를 꼬집는 이 시대 '풍자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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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국 편집에디터 isomis@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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