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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연│내 이야기의 바탕이 된 영화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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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연│내 이야기의 바탕이 된 영화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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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역시 한 해 동안 수많은 드라마들이 만들어졌고 브라운관을 채웠다. 여전히 한 편에서는 출생의 비밀과 삼각관계, 불륜으로 지지고 볶느라 여념이 없었고, 기본적인 드라마 트루기조차 갖추지 못한 채 날림으로 세워진 드라마들이 방송을 탔다. 이 와중에 등장한 <뿌리깊은 나무>는 한국 드라마 산업 전체의 구원투수라고 할만 했다. 육두문자를 시원하게 내뱉는 왕, 왕의 대의를 비웃는 백성, 한글 창제의 중심에 위치한 궁녀. <뿌리깊은 나무>의 인물들은 일반적인 사극이 제시했던 스테레오 타입에서 한참 빗겨나 있다. 그리고 저마다의 의지로 움직이는 이들은 조선이라는 시대의 한계를 깨부수는 동시에 사극의 클리셰를 격파해 나가는 드라마의 가장 큰 힘이 되어주었다. 태평성대를 구가한 성군으로만 박제되었던 세종(한석규)을 치열하게 일하고, 고민하고, 싸운 인간으로 등장시킨 것으로 시작해 스스로의 길을 가기 위해 생을 바친 채윤(장혁), 소이(신세경), 정기준(윤제문)을 통해 사극이 과거를 소환하는 장르가 아니라 현재를 담아내는 좋은 그릇임을 증명했다. 단순히 몇 개의 유행어를 남기거나 뛰어난 배우의 재발견을 넘어 정적인 세종과 정기준이 벌인 기나긴 논쟁은 동시대에도 의미를 가졌다. “백성을 귀찮게 여긴 것”이라는 정기준의 반격에 자신의 신념조차도 의심하고 되짚어보는 세종은 정치인만 넘쳐나고 지도자가 부재한 지금, 이 땅에 날카로운 질문을 던졌다. 공기처럼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했던 한글에 담겨진 선의와 전복성은 스마트폰으로 간단한 문자를 보내는 일상마저도 특별한 순간으로 만들었다.

<뿌리깊은 나무>는 끝났지만 김영현 작가와 함께 단단하게 뿌리 내린 세계를 만들어낸 박상연 작가의 고민은 끝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여물 때쯤 우리는 그가 만들어낸 또 다른 세계와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그 때까지 기다리기 힘들다면 “수첩에 메모해가며 영화를 보던” 영화광이자 <공동경비구역 JSA>, <고지전>의 시나리오를 탄생시킨 박상연 작가가 추천하는 영화를 먼저 만나보자. 그의 이야기에 자양분이 되거나 영감을 준 영화들에서 SF물을 꿈꾸는 박상연 작가의 다음 작품에 대한 힌트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10_LINE#>
1. <공각기동대> (Ghost In The Shell)
2002년 | 오시이 마모루

“처음 봤을 때 받았던 충격이 지금까지도 이어지는 영화예요. 저의 차갑고 싸늘한 세계관이 여기서부터 비롯된 것 같아요. 철학적인 질문을 많이 던지는 영화이면서도 인간이란 무엇인가, 생명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을 주진 않아요. 그럼에도 어떤 깨달음이랄까요. 인간도 다른 형태의 기계일 뿐이라는 말이 참 와 닿았어요. 당시 PC통신을 하면서 장문의 감상문을 올리기도 할 정도로 푹 빠져 있었죠. 지금도 여전히 이런 SF물을 하고 싶고, 드라마를 쓴다면 오시이 마모루 감독의 영향을 많이 받은 작품이 나올 것 같아요.”
인간은 어떤 생물과 비교해도 우위에 있고, 가장 진화된 존재라는 뿌리 깊은 맹신. 더군다나 비교대상이 기계일 경우엔 그것은 믿음을 넘어 반론이 제기될 수 없는 명제가 된다. <공각기동대>는 인간에게만 있다고 생각되는 영혼의 개념을 사이보그에게도 이식하면서 인간 중심적인 사고방식에 매섭도록 서늘한 이의를 제기한다.

2. <라이터를 켜라> (Break Out)
2002년 | 장항준

“저는 이 영화가 재평가 받아야한다고 생각해요. (웃음) 태어나서 제일 많이 본 영화가 <라이터를 켜라>예요. 50번은 넘게 봤을 걸요. 영화적 완성도가 완벽하거나 철학적 질문을 담은 영화는 아니지만 영화라는 게 사람을 즐겁게 해주고 위로해 줄 수 있다면 최고가 아닐까요? 주인공 세 명이 각각 다른 의지를 가진 삼자 구도인데다가 그들의 의지로 이야기가 꼬이는 게 참 재미있는데 <뿌리깊은 나무>의 이도, 강채윤, 정기준도 그런 관계예요. 이 영화를 보고 한 건 아니지만 그런 구도에 흥미를 느끼는 것 같아요.”

<라이터를 켜라>는 우연이라는 작은 씨앗이 오기라는 자양분을 먹고 자라 걷잡을 수 없이 커져버린 전형적인 소동극을 다루고 있다. 내 라이터를 찾기 위한 몸부림이 열차 테러를 저지하는 데까지 나아가는 ‘잉여’ 청년의 하루는 눈물 나게 가련하다가도 방바닥을 구를 정도로 웃긴다. 각종 예능 프로그램에서 열등감까지 토크의 소재로 승화시키는 존재감을 과시한 장항준 감독의 데뷔작.
3. <스왈로우테일 버터플라이> (Swallowtail)
2005년 | 이와이 슌지

“참 쓸쓸한 영화예요. 이와이 슌지 감독의 다른 작품들과 분위기도 많이 다르구요. 이후에 감독의 작품들을 모두 찾아봤는데 이만큼 좋았던 영화가 없었어요. 현대의 일본을 배경으로 찍었지만 가상의 공간에서 벌어지는 이야기예요. 많은 캐릭터들이 등장하는데 전부 다 좋아하고 임팩트 있는 인물들이예요. 작은 조연들까지도 캐릭터가 굉장히 좋다보니까 분석하면서 시나리오를 쓸 때 힌트가 되기도 했어요.”

벚꽃이 날리거나 흰 눈이 쌓이거나. 이와이 슌지 감독의 영화에서 기대되는 아련한 첫사랑의 순간이 <스왈로우테일 버터플라이>에는 없다. 대신 사랑이라고는 한 줌도 건지기 힘들 것 같은 폐허와 그 위에서 어떻게든 살아가려는 사람들이 있다. 선의와 상관없이 꼬여버리는 이들의 삶은 영원히 풀 수 없는 매듭처럼 서로를 옭아맨다.

4. <성스러운 피> (Holy Blood)
1994년 | 알레한드로 조도로프스키

“이 코너에서는 보통 있어 보이는 예술 영화를 많이 넣어서 저도 고민을 좀 했어요. (웃음) <성스러운 피>는 얼핏 어려운 예술영화로 인식이 되어있는데 사실 정말 재미있는 영화예요. <유주얼 서스펙트>나 <식스센스> 이전에 최고의 반전영화구요. 중반에 약간 지루할 수도 있는데 끝까지 보시면 마지막 반전이 밝혀지는 부분에서 큰 재미를 느끼실 거예요. 저도 그런 반전을 노리고 계속 변주하고는 있는데 그렇게 잘 되지는 않더라구요. (웃음)”

90년대 시네필들의 필수 상영 목록에 빠지지 않았던 컬트영화 <성스러운 피>. 엽기적인 살인 사건을 저지른 남자의 일생을 따라간 영화는 충격적인 이미지 이면의 상징들로 가득 차 있다. 이탈리아 호러 영화의 상징인 다리오 아르젠토의 동생 클라우디오 아르젠토가 감독과 함께 각본을 맡았고 최근 <드라이브>를 통해 니콜라스 윈딩 레픈 감독이 특별한 존경을 표하기도 한 알레한드로 조도로프스키 감독의 대표작이다.

5. <지옥의 묵시록: 리덕스> (Apocalypse Now)
1998년 |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

“<지옥의 묵시록: 리덕스>는 영화 자체가 가지는 느낌이 굉장히 참혹해요. 시체의 산이 나오거나 피의 강이 나오는 것도 아닌데 말이죠. 하지만 전쟁의 광기를 형상화 하는데 있어서 이 영화만큼 잘 그려낸 영화가 있을까요? 이 영화를 보지 않았으면 <공동경비구역 JSA>도 <고지전>도 안 나왔을 거예요. <고지전>의 경우엔 <지옥의 묵시록: 리덕스>를 너무 좋아해서 기획 초반에 오마주처럼 구성도 비슷하게 해보려고 했죠. 한국전쟁의 속살을 보여주겠다는 야심이 있었죠. (웃음)”

인간은 지옥을 두려워하지만 스스로 지옥을 만들어내길 서슴지 않는다. 인류 최악의 발명품 전쟁은 지나간 자리를 모두 지옥으로 만들어 버리고, 계속되는 베트남 전쟁은 의욕 넘치는 젊은 대위(마틴 쉰)를 미치게 만든다. 실제 필리핀 정글에서 이루어진 촬영은 전쟁처럼 열악했지만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 감독은 제 32회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하며 거장의 칭호를 얻었다.
<#10_LINE#>
말은 그것은 내뱉은 사람을 닮고, 글은 그것을 써내려간 사람을 담는다. 박상연 작가는 <뿌리깊은 나무>의 한글 창제 과정을 통해 풍요로운 텍스트를 만들어낸 글쓴이답게 말과 글에 대한 책임을 절감했고, 그것은 한글을 쓰고 있는 우리 모두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세종이 ‘백성을 어엿비 녀겨 맹가’ 놓은 한글을 매일 적고, 자판으로 두드리는 우리는 다음 그의 목소리에 귀기울여야할 것이다.

“요즘 ‘나는 꼼수다’나 영화 <스파이더맨>의 “거대한 힘에는 거대한 책임이 따른다”는 대사에 대해 많이 생각합니다. 어떤 어마어마한 힘을 갖게 되면 내가 힘을 움직이는 게 아니라 힘이 나를 움직일 수도 있겠구나. 우리는 그 정도는 아니지만 대중을 상대하는 매스미디어에서 일을 하는 사람들이니까 무엇으로 책임을 질 것인가. 내가 생각하기에 작가는 하고 싶은 말이 있어야 하고, 그 말을 사람들이 듣고 싶은 이야기로 변환시킬 수 있어야 하는 것 같아요. 그런데 거기 하나 더 추가해서 책임질 수 있는 말인가를 반드시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요.”

<10 아시아>와 사전협의 없이 본 기사의 무단 인용이나 도용, 전재 및 재배포를 금합니다. 이를 어길 시민, 형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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