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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보위 가사 심의, '시대 흐름' 홀로 역행

최종수정 2008.12.06 14:00 기사입력 2008.12.06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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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신문 이혜린 기자]청소년보호위원회(이하 청보위)의 대중가요 가사 심의가 시대흐름과 방향을 달리해 '혼자' 역행하고 있다. 일본 등 해외에서도 대대적으로 보도될 만큼 독특한 사례로 꼽히고 있다.

청보위는 최근 크게 히트한 비의 '레이니즘'과 동방신기의 '주문'에 뒤늦게 빨간 딱지를 붙였고, 앞으로도 이같은 수준은 청소년 유해물 판정을 받게 될 거라며 창작자들에게 경고하고 나섰다. 이와 관련, 동방신기의 소속사 SM엔터테인먼트는 "관할법원에 행정처분(유해매체물결정)의 효력정지가처분 신청을 제기할 계획"이라고 공식입장을 정리하고 대립각을 세운 상태다.

이번 심의를 두고 논쟁의 여지는 많다. 청보위가 듣는 사람에 따라 그 의미를 달리 할 수 있는 은유법과 전체적인 분위기까지 심의의 대상에 올린 것이기 때문. 100가지 의미 중 하나라도 유해하면 유해한 것으로 단언해버리는 '뻣뻣한' 사고방식이 통했다는 점과, 향후 가요계의 표현 수위가 대폭 하향 평준화 될 것이라는 점에서 꽤 심각한 부작용이 예상되고 있다.

# 사고 유연성 위축

이 판정은 우선 대중이 자체적으로 선정적인 것을 걸러내고 비판할 수 있는 여론 형성 기능을 완전히 무시한 처사로 풀이된다. 이미 청소년을 포함한 대중 사이에 큰 저항 없이 받아들여진 히트곡이 정부기관의 제제를 받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청소년 보호법이 문화의 변화속도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는 비판도 설득력을 얻는다.

'주문'의 경우 이 노래가 공중파 음악프로그램에서 1위를 하고 음반판매량 30만장을 기록하는 동안, 청소년들은 가사에 대해 선정적이라고 느끼지 않았다. 이를 '유해'하게 해석한 것은 어른들로 이뤄진 청보위가 처음이다시피 하다.

청보위가 밝힌 '주문'의 청소년 유해판정 근거는 "전체적인 분위기가 청소년이 즐기기엔 야하다"는 것. "단어들을 다 떼어놓고 보면 문제가 없지만, '널 가졌어' '언더 마이 스킨(Under my skin)' 등의 표현 수위를 낮춰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널 가졌어'의 경우 영화, 드라마에서 워낙 자주 쓰이는 말인데다 '언더 마이 스킨'은 '너에게 푹 빠졌다'는 의미의 영어 표현이라 청소년에게 어떻게 해로운 건지 가늠하기 쉽지 않다.

앞서 '레이니즘'의 경우도 보다 유연한 해석이 가능한 케이스. 청보위가 문제 삼은 '매직스틱'이라는 단어는, 물론 남성의 특정 신체기관을 떠올리게 할 수도 있는 표현이다. 실제로 그런 뜻의 속어로 쓰이기도 한다. 그러나 또 다른 중의를 가질 수 있다는 비의 의견도 일리는 있다. 단순한 지팡이춤을 묘사한 가사로 볼 수도 있는 것이다. 직설이 아닌 은유이기에, 해석은 각 수용자의 자율에 맡기는 게 정답일 수 있다.

오히려 가사를 수정하면서까지 보호해야 할 '순진한' 청소년이라면 가사를 유해한 방향으로 해석할 능력도 없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지 않은 청소년이 있다면, 가사를 뜯어고칠 게 아니라 제대로 성문화를 접하고 해석할 능력을 배양시키는 게 우선이다.

# 무난한 가사만 발표

사전 심의는 표현의 자유를 침해한다는 이유로 철폐된 상태. 그러나 청보위의 가사 심의가 사실상의 사전 심의 역할을 할 가능성도 있다.

청소년 보호법의 위력은 꽤 센 편이다. 청소년 유해물로 판정될 경우 밤 10시 이전에 케이블을 포함한 방송사 전파를 탈 수 없으며, 빨간 딱지 없이 유통되다 적발되면 징역 2년 이하 벌금 1000만원형에 처할 수 있다.

또 발매 두달이 지난 앨범에 대해 새로 빨간 딱지를 붙이고 클린버전 CD를 재발매하는 것은 음반사에게 금전적 손실을 안겨다준다. 수익구조가 안정적이지 못한 음반사로서는 여러모로 피하고 싶은 판정인 셈.

청보위가 논쟁의 여지가 있는 곡에 대해서도 이같이 유해물 판정을 내리기 시작한다면, 음반사는 번뜩이는 아이디어를 묻어버리고, 무난한 표현을 선택할 가능성이 높다. 아직은 가요가 방송에 기대서 홍보해야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 추후 문제거리가 될만한 요소는 애초에 없애버리는 게 낫다는 제작자와 조금 더 표현의 영역을 넓히고 싶은 창작자간의 충돌도 늘 것으로 보인다.

물론 자율심의제도를 활용, 가수가 먼저 빨간 딱지를 붙이고 앨범을 제작할 수도 있다. 그러나 '아사' 직전인 가요시장에서 주소비층인 청소년을 배제하고 성인만을 위한 대중음악 앨범을 제작한다는 것도 쉽지는 않다.

이로써 보수층 '어른'들의 심기를 불편케 할만한 모든 표현은 대중가요의 가사에서 사라질 가능성이 높다. 기준도 모호하니 나중에 문제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면 '싹'부터 없앨 것이기 때문.

물론 청소년은 매우 선정적인 노래로부터 보호돼야 한다. 그러나 그 선정성의 기준은 국민의 여론을 충분히 수렴해야 한다. 청보위가 모니터 요원 4명을 가동해 포털사이트에서 유통되고 있는 음원을 찾아내고, 심사위원 몇명이서 회의를 거쳐 유해물을 판정하는 것은 '그들만의' 심의인 셈이다. 이미 왠만한 사람들이 모두 알고 있는 곡에 대한 판정이라면, 보다 많은 사람들의 의견이 수용돼야 할 것이다.

가요계는 즉각 반발하기엔 눈치 볼 것이 많은 상태다. 가요관계자들 모두 "말도 안된다"고 언성을 높이면서도 정부 산하 기관에 정면으로 맞서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닌 것. SM엔터테인먼트가 행정처분 효력정지가처분 신청을 제기한 것에 지지를 표명하는 정도에 그치고 있다.

청보위는 상대적으로 여유로운 상황. 청보위는 "'주문'에게 유해물 판정을 내린 기준을 끝까지 유지, 다른 곡에 대해서도 심의를 계속할 방침"이라면서 "비록 사전에 막진 못해도 사후에라도 이같은 판정을 내려 향후 다른 작사가들에게 기준을 제시하려는 의도도 있다"고 밝혔다.

이혜린 기자 rinny@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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