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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대우의 경제레터] 미혼모 아들-스티븐 잡스

최종수정 2020.02.12 13:14 기사입력 2007.12.03 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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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은 아름답습니다. 추억을 떠올리면 누구나 신나게 얘기를 늘어놓습니다. 모질게 힘들었던 추억일 경우 더욱 그렇습니다. 남자끼리 모여 군생활 얘기가 나오면 시간가는 줄 모릅니다. 군 생활이 그만큼 힘이 들고 즐거웠던 일보다 괴로웠던 때가 많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한국에서 지금 50대가 넘은 사람들은 누구나 찢어지게 가난했던 어린 시절의 추억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현재 기업에서 최고사령탑에 올랐거나 정치권에서 지도자의 위치에 있는 사람치고 부유한 집안에서 넉넉하게 성장했던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대선주자들이 재래시장을 찾아, 어려운 달동네를 찾아 과거 자신의 추억을 떠올리는 것도 이런 배경이 깔려 있습니다.

그러나 이처럼 힘들고 어려웠던 어린 시절 얘기를 하면 젊은이들은 금새 듣기 싫다는 표정입니다. 자신이 어려운 시절을 신념과 끈기로 헤쳐 나왔는데 "너희들은 지금 뭐냐?"고 꾸짖으면 자녀들은 듣는척하면서도 반항적인 자세를 취합니다. 말하는 사람은 힘들었던 시절을 즐거운 추억으로 미화하려하지만 듣는 젊은이 입장에서는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는 식입니다.

최근 스티븐잡스 애플사 회장 겸 최고경영자가 세계적으로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포춘지가 그를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경영자 25명중 1위로 선정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3년전만 해도 파워기업인 25명 명단에 끼지도 못했습니다. 그는 1977년 PC시대를 열었고 1984년 매킨토시를 통해 그래픽 유저 인터페이스를 보급했습니다. 근래에는 미디어 플레이어 아이팟(iPod)와 아이툰스(iTunes)로 온라인 음악시장에 일대 변혁을 몰고 왔습니다. 그래서 스티븐 잡스는 "경영의 베토벤"이라는 극찬까지 받고 있습니다. 그의 경영능력과 비전을 음악의 대가인 베토벤에 비유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스티븐 잡스를 얘기하면서 그의 경영철학이나 기발한 아이디어를 화제로 삼습니다. 그러나 그의 불우했던 시절의 얘기는 묻혀있습니다. 힘겨웠던 때의 스티븐 잡스를 다시보면서 역시 그가 위대한 기업인이라는 점을 인식하게 됩니다.

그는 스무살 때 부모의 차고에서 스티우즈니액과 공동으로 애플을 창업했습니다. 10년이 지난 후 애플은 차고에서 20억달러 매출에 4000명의 직원을 가진 회사로 성장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해고를 당했습니다. 자신이 창업한 회사에서 해고를 당한 것입니다.

애플이 커지면서 회사를 운영할 전문경영인을 고용했고 그 후 미래에 대한 관점에 분쟁이 생기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분쟁이 생겼을때 이사회는 전문경영인을 지지했고 그는 서른살에 자신이 설립한 회사에서 쫓겨나게 된 것입니다. 그때 그는 실리콘밸리에서 도망갈 생각까지 했다고 합니다.

그는 그 후 5년 동안 NEXT와 Pixa라는 이름의 다른 회사를 시작했습니다. 이 회사는 세계 최초의 컴퓨터애니메이션 영화인 토이스토리를 만들었고 지금 세계에서 가장 성공적인 애니메이션 회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애플은 이 회사를 사들였고 그는 애플로 다시 복귀했습니다.

그는 애플에서 해고되지 않았더라면 이런 기이한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인생은 때로 고통스러운 일이 생기지만 신념은 결국 인생을 승자로 만든다는 게 그의 철학입니다. 자신이 하는 일을 사랑한 것이 오늘의 자신을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그가 미국 스탠포드대학 졸업식장에서 한 축사는 두고두고 회자되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성공한 사람들이 그랬듯이 스티븐 잡스 역시 불우했던 어린시절, 젊은 시절의 힘겨웠던 생활을 좋은 추억으로 승화시킨 주역입니다. 저는 그의 스탠포드 대학 축사를 접하고 스티븐 잡스의 새로운 생명력을 발견했습니다. 화려한 현재는 힘겨웠던 과거의 점을 모은 것이고 때문에 지금 우리가 무슨 점을 찍어야하는지를 생각게 했습니다. ‘경영의 베토벤’ 스티븐 잡스의 젊은 시절을 음미하며 새로운 미래의 점을 찍는 월요일 출발하시기 바랍니다.

"나는 대학을 졸업하지 않았습니다. 리드대학을 6개월 다닌 후 그만두었습니다. 그 후 18개월은 비정규 청강생으로 머물렀고 그 후 진짜로 그만두었습니다. 내가 왜 대학을 그만두었을까요?

이 얘기는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시작됩니다. 내 생모는 젊은 미혼의 대학생이었습니다. 어머니는 나를 낳으면 다른 사람에게 입양을 시키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태어나면 바로 어떤 변호사 부부에게 입양되기로 되어 있었고 그것으로 모든 것이 끝난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내가 태어났을 때 나를 입양키로 한 부부는 마음을 바꾸어 자신들은 여자아이를 원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나의 생모는 한밤중에 입양대기자 명단에 있는 다른 부부에게 전화를 걸어 입양을 부탁했습니다.

생모는 나중에야 나를 입양한 부모가 대학을 나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생모는 이 때문에 최종적인 입양서류에 서명을 하지 않다가 몇 달 후 양부모가 나를 나중에 대학에 보낼 것이라는 약속을 하고서야 마음을 바꿨습니다.

17년이 지난 후 나는 정말 대학에 갔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때 스탠포드와 거의 맞먹는 수준의 학비가 드는 대학을 선택했고 노동자였던 내 양부모는 저축한 모든 돈을 내 대학등록금에 써야 했습니다. 그렇게 6개월이 지난 후 나는 그만한 돈을 쓰는데 대한 가치를 느낄 수 없었습니다.

나는 내가 내 삶에서 무엇을 하기를 원하는지 알지 못했고 대학이 그것을 아는데 어떤 도움을 줄 것인지도 알지 못했습니다. 그런데도 양부모는 전 인생을 통해 저축해 놓은 돈을 내 학비를 위해 쓰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대학을 그만두기로 했습니다. 그런 결정은 다소 두려운 것이기도 했지만 지금 돌아보면 그것이 내가 지금까지 한 가장 훌륭한 결정중의 하나였습니다. 학교를 그만두는 순간 내가 관심을 가진 과목만 청강했습니다.

나는 기숙사 방이 없었기 때문에 친구방 바닥에서 잠을 잤습니다. 음식을 사기위해 되돌려주면 5세트를 주는 콜라병을 모으는 일을 했고 해어 크리슈나 사원에서 일주일에 한번 주는 식사를 얻어 먹기 위해 일요일 밤마다 7마일을 걸어가곤 했습니다.

(중간생략)

우리는 미래를 내다보면서 점을 이을 수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10년이 지난 후 과거를 이을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지금 잇는 점이 미래의 어떤 시점에 서로 연결될 것이라는 신념을 가져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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