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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산家의 3·4세들] "눈칫밥 먹어봐야 노동 중요성 안다"

최종수정 2007.08.21 11:28 기사입력 2007.08.21 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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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승직 상점과 박두병 초대회장

두산그룹의 창업주인 매헌 박승직은 "재산을 물려주는 것 보다 교육을 시키는 게 더 좋은 유산"이라고 입버릇처럼 말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고 박두병 초대회장을 인사동에 있는 유치원에 다니게 하면서 따로 한문공부를 시키는 열성을 보였다. 일부러 일본인 학교에 보내 "일본인과의 경쟁에서 이기려면 그들을 알아야 한다"고 가르쳤다.

박승직은 "재물은 있다가도 없는 것이지만 머리 속 지식은 빼앗을 수 없는 것"이라고 자식들을 가르쳤고 박두병 초대회장은 부친의 뜻에 따라 일본인 소학교에 입학했다.

박승직은 귀하게 구한 산삼을 먹일 정도로 46세에 나은 늦둥이 박두병을 극진히 아꼈다. "남의 밑에 가서 눈치밥을 먹어봐야 노동의 귀중함을 알 수 있다"는 선친의 뜻에 따라 박두병은 경성고등상업학교(현 서울 상대)를 졸업하고 조선은행에 근무했다. 이러한 교육관은 3, 4세에게도 이어졌다.

박두병도 '이왕 남의 밥을 먹을 바에는 은행에 들어가 은행업무를 익히는 게 사업에서 성공할 수 있는 열쇠'라고 생각했다.

두병은 특히 등산을 좋아했고 일찍부터 골프를 시작해 1966년 한국골프협회 회장을 지내기도 했다. 당시 국내에서 유일한 골프코스는 27년 개장한 능동의 경성컨트리클럽(현 서울컨트리클럽)이었다. 집에 암실까지 갖출 정도로 사진찍기를 좋아하기도 했다.

그런 박두병은 1936년 3년간의 은행 생활을 마치고 가업을 잇기 위해 박승직상점의 상무로 입사했다. 박두병은 출근부를 도입하고 성과에 따른 상여금을 차등 지급하는 등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인사제도를 도입하고 복리후생을 위해 사내 야구부도 만들었다.

일본이 41년 제2차 세계대전에 뛰어들면서 박승직상점에서 취급하는 품목들도 군수물자로 징발되면서 사업이 어려워졌다. 당시 박승직과 김연수(전 삼양사 사장)가 일본 소화기린맥주의 대리점을 차리게 됐다. 이것이 60여 년간 두산그룹의 모태가 됐던 동양맥주의 전신이다.

일제가 패망하자 박두병은 자치위원회 권유로 영등포에 있던 소화기린맥주의 관리 지배인으로 출근했고 두산그룹의 2대 회장을 지낸 고 정수창 회장은 이 때 평사원으로 경리과에 입사했다. 1947년 드디어 동양맥주가 OB맥주라는 상표를 달고 탄생했다. 박두병은 관리 취체역으로 취임했다.

박두병은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강조하고 사시를 '인화(人和)'로 정했다. 박두병의 노블리스 오블리제는 그의 호를 딴 연강재단의 탄생으로 꽃을 피웠다.

박승직은 아들 두병의 이름 첫자인 두(斗)자에 뫼 산(山)자를 붙여 두산이란 상호를 지었다. '한 말 한 말 차근차근 쉬지 않고 쌓아 올려 산 같이 커지라는 뜻'이었다. 산 처럼 커지라는 박승직의 뜻은 오늘날 3~4세의 경영 플랜으로 이어지고 있다.

김민진, 황준호 기자 asiakmj@newsv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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