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더위가 절정에 이르던 지난달, 부산 기장에 사는 4살 민준이(가명)는 엄마 손에 이끌려 이른 아침부터 KTX를 타고 서울로 향했다. 이틀 전 인근 병원에서 받은 혈액검사 결과, 혈중 칼륨과 크레아틴 수치 등 몇 가지 지표가 좋지 않게 나와 긴급 입원이 결정됐기 때문이다. 엄마는 등에 커다란 가방을 메고, 한손에는 작은 여행용 가방을, 다른 한 손에는 민준이의 손을 붙잡은 채 부산 기장에서 차를 타고 부산역까지, 부산역에서 KTX를 타고 서울역까지, 다시 서울역에서 지하철로 서울대병원이 있는 혜화역까지 부지런히 발걸음을 옮겼다. 꼬박 5시간이 걸렸다.
민준이는 생후 2개월 때 갑자기 빈혈 증상을 보여 양산부산대병원에 입원했다. 각종 검사를 받았지만 명확한 원인을 찾지 못한 채 희소병을 의심하며 치료를 받았고, 그 사이 간과 신장이 나빠지면서 6개월 때부터 투석을 받아야 할 상태가 됐다. 부산 병원에서는 더 이상 해줄 수 있는 게 없다며 서울 큰 병원으로 전원을 권유했고, 선택의 여지 없이 서울대병원에 입원해 수액 치료와 복막투석을 시작했다. 서울대병원은 우리나라 유일의 소아청소년 전용 인공신장실(투석실)을 운영하고 있을 만큼 소아신장 질환에 있어선 폭넓은 임상 경험과 최상의 진료 능력을 보유하고 있다. 현재 민준이는 집에서 매일 밤 잠자는 동안 복막투석을 받고 있지만, 한 달에 한 번은 서울대병원에 가서 전반적인 건강 상태를 체크하고 투석으로 인한 전해질 불균형이 오지 않도록 약물 치료를 받고 있다.
보호자가 오롯이 감당해야 하는 투석도 쉽지 않지만, 더 큰 문제는 아이가 가벼운 감기나 장염에 걸렸을 때조차 응급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는 점이다. 민준이의 경우 감기로 동네 소아청소년과에서 약 처방을 받을 때도 서울대병원 투석실에 처방전을 보내 사용 가능한 약인지 확인을 받아야 한다. 지난해 갑작스럽게 열이 오르고 발작이 있었을 땐 부산에서 소아 환자를 받아줄 상급종합병원 응급실을 찾지 못해 구급대원들이 헬기까지 띄우려 수소문하다 다행히 한 병원에서 응급 처치를 받은 뒤 이튿날에야 서울대병원에 입원할 수 있었다. 응급 상황뿐 아니라 투석 환자들에게서 나타날 수 있는 각종 합병증이나 아이의 발달과 관련한 문제들, 유전질환 여부 등을 검사하고 추적 관찰하기 위해서도 관련 과 진료가 용이한 서울대병원을 이용할 수밖에 없다.
민준이 엄마는 "소아 투석이나 신장 분야에서 가장 훌륭한 의료진이 이 병원에 있고, 가장 많은 환자들이 오는 데다 세계적인 병원들과 연결돼 있다니 힘들어도 계속 서울로 진료를 올 수밖에 없다"며 "부모 입장에선 지금 당장 부산에 새로운 소아신장과가 개설된다 해도 의료 시스템이 더 체계적으로 잘 갖춰진 서울 병원을 택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중증 소아환자 진료를 위해 전국의 모든 병원이 세부 진료과를 운영하고 전문의를 두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소아투석처럼 환자는 소수지만 의료진의 긴밀하고 집중적인 관리가 필요한 경우는 더욱 그렇다. 현재 만성 콩팥병 등으로 투석을 받아야 하는 소아환자는 전국적으로 60명 정도인데, 이런 소아환자를 진료하는 병원은 서울의 빅5 외에 경북대, 전남대, 제주대병원 등에 불과하다.
소아신장 병원 수가 적은 것은 그만큼 '고난도·고위험' 진료이지만 동시에 '저보상' 과목이기 때문이다. 강희경 서울대병원 소아청소년과 교수는 27일 "소아는 성인보다 체구가 작아 투석이 어려울 뿐 아니라 감염 등 합병증 위험도 높고 소아 전문인력이나 시설, 장비를 갖추는 데에도 많은 비용이 들어간다"며 "하지만 정작 환자 수가 적고 적절한 수가 등 보상은 뒷받침되지 않아 병원들도 굳이 진료과를 개설하려 하지 않는다"고 전했다. 환자들이 진료를 위해 몇 시간씩 걸려 지역에서 대도시로, 서울로 이동해야 하는 건 매우 번거롭고 안타깝지만 현실적으로 모든 병원에 소아신장과를 두는 건 어렵다는 얘기다.
가장 좋은 건 지역(권역)별로 한정된 자원을 효과적으로 이용할 수 있도록 전문성 있는 병원에 의료진을 집중하고, 응급 상황에선 각 지역의 연계 병원이 대처할 수 있도록 하는 방법이다. 예를 들어 같은 부산경남권이라면 한 병원엔 소아신장과 의료진을, 또 다른 병원엔 소아혈액종양과 전문의를 집중 배치해 공백이 생기지 않으면서도 전문적인 의료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는 진료체계를 구축하는 것이다. 의료 인력이나 장비를 전국에 분산하기보다 거점 지역 한 곳으로 모으면 운영 효율성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환자 역시 한 병원으로 모이면 임상 정보와 사례 등이 빠르게 연구로 연결될 수 있고, 임상시험 참여나 신약·신치료법을 적용받는 기회도 더 많아지게 된다.
김혜리 아산병원 소아청소년종양혈액과 교수는 "네덜란드의 경우 2018년 전국에 있던 7개 소아암 센터를 하나로 통합해 수백 명의 연구자와 의료진이 한 곳에서 모여 치료법을 개발하고 직접 임상에 적용하는 구조를 갖추면서 환자 생존율 등 치료 성과가 높아졌다"고 설명했다. 현재 일 년에 약 600명 발생하는 네덜란드의 소아암 환자는 모두 프린세스막시마센터(Princess M?xima Center for Pediatric Oncology)라는 병원에 보호자와 함께 입원해 치료받고 있으며, 치료 중에도 체계적인 교육(학교), 심리상담, 가족 지원 등을 받고 있다.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