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 "십년지기에게 은신처·차명폰 부탁 범인도피교사 아냐"

지명수배된 범인이 10년 넘게 가깝게 지낸 지인에게 자신의 은신처와 차명 휴대전화 마련을 요청한 행위는 범인도피교사죄로 처벌할 수 없다는 대법원 판단이 나왔다.


범인의 부탁을 받고 은신처와 차명폰을 마련해준 사람이 범인도피죄에 해당하더라도, 범인의 입장에서는 은신처나 차명폰을 구하기 위해 타인에게 부탁하는 행위가 자신의 도피를 위한 통상적인 범주 내의 행위로 볼 수 있다는 취지의 판결이다.

22일 법조계에 따르면 대법원 3부(주심 엄상필 대법관)는 특정범죄가중법 위반(향정) 및 범인도피교사 혐의로 기소된 최모씨에게 징역 8년을 선고한 원심판결을 깨고 사건을 서울고법으로 돌려보냈다.


서울 서초동 대법원.

서울 서초동 대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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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인도피죄를 규정한 형법 제151조 1항은 '벌금 이상의 형에 해당하는 죄를 범한 자를 은닉 또는 도피하게 한 자는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5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고 정하고 있다.


재판부는 대법원 판례를 원용해 "범인 스스로 도피하는 행위는 범인도피죄로 처벌되지 않으므로, 범인이 도피를 위해 타인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행위 역시 도피행위의 범주에 속하는 한 처벌되지 않으며, 범인의 요청에 응해 범인을 도운 타인의 행위가 범인도피죄에 해당하더라도 마찬가지이다"라고 전제했다.

그동안 대법원은 범인의 부탁을 받고 범인을 도피하게 한 사람이 범인도피죄의 구성요건에 해당돼 처벌되는 경우라도 범인의 입장에서 볼 때 통상적인 범인의 도피행위 범주 내의 행위로 판단될 경우 범인도피교사죄 성립을 부정해왔다.


재판부는 또 " 다만 범인이 타인으로 하여금 허위의 자백을 하게 하는 등으로 범인도피죄를 범하게 하는 경우와 같이 방어권의 남용으로 볼 수 있을 때에는 범인도피교사죄에 해당할 수 있다"라며 "이 경우 방어권의 남용이라고 볼 수 있는지는, 범인을 도피하게 하는 것이라고 지목된 행위의 태양과 내용, 범인과 행위자의 관계, 행위 당시의 구체적인 상황, 형사사법의 작용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위험성의 정도 등을 종합해 판단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그리고 이번 사건에 대해 "피고인의 행위가 일반적인 도피행위의 범주를 벗어나 형사사법에 중대한 장해를 초래하거나 형사피의자로서 가지는 방어권을 남용한 경우에 해당한다고 본 원심의 판단은 그대로 수긍하기 어렵다"고 파기환송의 이유를 밝혔다.


최씨는 양모씨와 공모해 태국에서 필로폰 1.5kg을 밀수입한 혐의로 2021년 10월 18일 검찰로부터 경기 남양주시에 있는 자신의 주거지 압수수색을 당했다. 압수수색 직후부터 최씨는 2010년부터 알고 지낸 이모씨에게 여러 차례 전화를 걸어 "법적으로 어지러운 일이 생겼다. 회사 대표가 구속되고 압수수색을 당했다. 수사관들이 머리카락을 잘라가고 소변검사도 했다"라며 "어디 머물 곳이 있느냐, 사용할 수 있는 휴대전화 1대만 마련해 달라"고 부탁했다.


이에 이씨는 최씨의 전화를 받은 날부터 최씨를 자신의 주거지인 경기 용인시의 한 건물에서 지내게 했고, 사흘 뒤 자신의 지인 명의로 휴대전화를 개통해 최씨에게 전달했다. 당시 이씨는 신용불량으로 본인 명의 휴대전화 개통은 어려운 상황이었다. 또 이씨는 2021년 10월 23일 검찰 수사관들이 집으로 찾아오자 "최씨를 본 지 오래됐다. 나는 최씨의 전화번호도 모르고 최씨랑 연락하려면 다른 지인과 연락을 해야 한다"라고 거짓말을 해 건물 안에 있던 최씨를 수사관들이 찾지 못하게 했다.


1심 법원은 최씨의 마약 관련 혐의와 범인도피교사 혐의를 모두 유죄로 인정, 징역 8년을 선고했다.


재판에서는 지명수배를 받고 쫓기던 최씨가 지인에게 은신처와 차명폰 마련을 요청한 행위를 방어권 남용으로 불 수 있을지가 쟁점이 됐다.


재판부는 "피고인의 행위는 스스로를 도피시키기 위한 것이기는 하나, 일반적인 도피행위의 범주를 벗어나 형사사법에 중대한 장해를 초래하거나 형사피의자로서 가지는 방어권을 남용한 경우에 해당한다고 봄이 상당하므로, 범인도피교사죄가 성립된다고 판단된다"고 밝혔다.


이어 "실제 이씨의 허위 진술로 인해 피고인은 체포되는 상황을 면하게 됐음은 물론 그 이후 수사기관에 변호인 선임서를 제출하고도 약 6개월가량의 도피 생활을 했다"라며 "그 과정에서 피고인에 대한 수사는 물론 공범들에 대한 수사 절차 및 재판 절차에도 장애를 초래했다"고 덧붙였다.


최씨는 불복해 항소했지만 2심 법원의 판단도 같았다.


하지만 대법원의 판단은 달랐다.


대법원은 최씨의 행위가 일반적인 도피행위의 범주를 벗어나 형사사법에 중대한 장해를 초래했거나 방어권을 남용한 경우에 해당한다고 보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그 같은 판단의 근거로 재판부는 3가지를 들었다.


먼저 재판부는 "이씨는 피고인과 10년 이상의 친분관계 때문에 피고인의 부탁에 응해 피고인을 도와준 것으로 보이고, 도피를 위한 인적·물적 시설을 미리 구비하거나 조직적인 범죄단체 등을 구성해 역할을 분담한 것은 아니었다"고 밝혔다.


또 재판부는 "피고인이 이씨에게 요청한 도움의 핵심은 은신처와 차명 휴대전화를 제공해 달라는 것이었고, 이에 이씨는 피고인으로 하여금 자신의 주거지에서 함께 생활하면서 다른 사람 이름으로 개통한 휴대전화를 사용하게 했다"라며 "이러한 행위는 형사사법에 중대한 장애를 초래한다고 보기 어려운 통상적인 도피의 한 유형으로 볼 여지가 충분하다"고 지적했다.


마지막으로 재판부는 "피고인과 이씨 사이에 암묵적으로 '피고인이 수사기관에 검거될 위험이 있다고 보이면 피고인의 소재에 관해 허위로 진술함으로써 피고인을 도피시켜 달라'는 취지의 의사가 있었고, 그 결과 피고인이 도피생활을 계속할 수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러한 의사나 그에 따른 도피의 결과를 형사피의자로서의 방어권 남용이라고 보기는 어렵다"고 덧붙였다.


과거 범인도피죄에 관한 대법원 판례 중에는 "수사기관에 참고인 신분으로 출석해 범인에 관해 조사를 받으면서 자신이 알고 있는 사실을 묵비하거나 허위로 진술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적극적으로 수사기관을 기만해 착오에 빠지게 함으로써 범인의 발견 또는 체포를 곤란 내지 불가능하게 할 정도의 것이 아니라면 범인도피죄를 구성하지 않는다"라며 체포된 피의자의 신원보증서에 피의자의 인적 사항을 허위로 기재한 보증인에게 범인도피죄 무죄를 선고한 사례가 있다. 원래 수사기관은 피의자나 참고인의 진술 여하에 불구하고 피의자를 확정하고, 그 피의사실을 인정할 만한 객관적인 증거를 수집·조사해야 할 권리와 의무가 있다는 이유였다.


반면 이번 사건에서는 최씨에게 은신처와 차명폰을 제공하고 수사기관에 거짓 진술을 한 이씨는 범인도피 혐의로 따로 기소돼 실형을 선고받고 형이 확정됐다.





최석진 법조전문기자 csj0404@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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