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적으로 재택(근무) 시켜줘야 하는 것 아니냐."
지난 1월 25일 설 연휴가 끝난 직후 영하 20도를 넘나드는 '역대급 한파'가 수도권을 강타하자 직장인들이 인터넷 커뮤니티에 재택근무 필요성을 언급했다. 코로나19로 집에서도 업무가 가능하다는 것을 확인했는데 꼭 한파를 뚫고 사무실로 나가는 것이 맞냐는 불만이었다. 코로나19 이전이었다면 과연 쉽게 터져 나올 수 있는 말이었을까. 이들은 집에서 회사로, 회사에서 집으로 이동하는 중에 맞딱뜨려야 할 추위에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다.
한국 직장인들은 희망 사항이었지만 미국은 좀 달랐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링크드인은 올해 1월 14~27일 미국 직장인 24만7000여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재택근무 비중이 지난해 10월 25%에서 올해 1월 28%로 높아졌다고 발표했다. '주로 사무실로 출근한다'는 답변은 58%에서 50%로 줄었다. 1년 동안 재택근무 비중이 줄고 현장 복귀가 늘어나는 추세였는데 이러한 분위기가 뒤바뀐 것이다. 1년 전 겨울에도 이러한 비슷한 양상이 있었다.
링크드인은 '혹독한 겨울 날씨'라는 계절적 요인이 근무 형태에 영향을 줬을 수 있다고 분석했다.
직장인에게 출·퇴근은 매일 치르는 여행이자 전쟁이다. 아침에 잠자리에서 눈을 떠 집 문밖을 나서서 회사로 출근하기까지 다양한 일이 벌어진다. 걷고, 달리고, 앉았다가, 일어서는 과정을 거쳐 사무실에 도착한다. 자가용, 버스, 지하철, 기차에 심지어는 비행기까지 다양한 교통수단을 활용한다.
서울·인천·경기 등 수도권 직장인들의 출근 시간은 평균 53분이다. 퇴근 시간도 동일하게 걸린다고 보면 수도권 직장인은 평균적으로 1시간 46분을 길에서 보낸다.
물론 출·퇴근은 한국만의 문제가 아니다. 전미경제연구소(NBER)에 제출된 보고서에 따르면 2021~2022년 기준으로 중국은 1시간 42분, 일본은 1시간 40분, 인도는 1시간 39분 등 아시아 국가가 다른 지역에 비해 출·퇴근에 쓰는 시간이 비교적 길었다.
미국 직장인의 경우 출·퇴근에 평균 하루 1시간을 쓴다. 회사 가는 길에 1시간 이상 소요하는 비중은 7.7% 수준이었고 뉴욕 등 도시 지역일수록 출근에 1시간 이상 걸리는 직장인의 비중은 10% 이상으로 늘어났다. 2021년 미국의 한 설문조사에서 직장인 10명 중 4명이 매장이나 사무실 등 작업장으로 출근하는 것보다 집에서 화장실을 청소하는 것이 더 낫다고 답할 정도였다.
출·퇴근 문제는 직장인이 재택근무를 원하는 첫 번째 사유로 꼽힌다.
지난해 6월 취업플랫폼 사람인이 성인 남녀 4534명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한 결과 응답자의 81.3%가 재택근무를 선호하는 이유로 '출·퇴근 시간이 절약돼서'라고 답했다. 입사 기업을 선택하는 기준으로 '재택근무 여부'를 포함하는 이유도 '출·퇴근 스트레스에서 해방돼서'가 61.1%로 가장 높게 나타났다. 출·퇴근 길에 이용객이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일명 '지옥철(지옥+지하철)'을 피하고 싶은 직장인들의 호소인 셈이다.
이러한 이유로 출·퇴근 시간이 길수록 재택근무를 바라는 직장인이 많은 건 어쩌면 자연스러운 현상일 듯 싶다. 유럽중앙은행(ECB)이 최근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편도 1시간 이상 통근하는 직장인은 한 달에 열흘의 재택근무를 원했다. 이는 통근 시간이 15분도 채 걸리지 않는 직장인보다 나흘이나 더 많았다. ECB는 "직업별 특성을 제외하고 나면 통근 시간이 직장인 개인에게는 재택근무를 희망하는 가장 중요한 요인이었다"고 평가했다.
코로나19로 재택근무가 확산하면서 직장인은 출·퇴근 전쟁에서 자유로워졌다. 그러고 나니 하루에 1시간이 넘는 여유시간이 생겼다. 이들은 이 시간을 무엇으로 채웠을까.
NBER가 지난 1월 발표한 '재택근무 시의 시간 절약' 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과 주요 7개국(G7)을 포함한 27개국에서 2021~2022년 직장인 1만9000명이 재택근무로 절약한 시간은 매일 평균 72분이었다. 이 중 가장 큰 비중인 29분(40%)이 일을 하는 데 쓰였다. 재택근무로 출·퇴근으로부터 자유를 얻었지만, 그중 절반 가까이를 업무에 쏟은 셈이다. 그렇지만 독서나 운동 등을 즐길 수 있는 여가 시간이 24분(34%) 생겼고, 육아를 포함한 돌봄 시간도 8분(11%) 확보했다.
한국만 따로 떼서 보면 재택근무로 아끼는 출·퇴근 시간은 하루 평균 86분으로, 27개국 전체 평균보다 10분 이상 길었다. 통근 시간이 그만큼 더 길다는 의미다. 한국 직장인은 그렇게 아낀 여가시간 중 업무에 34.4분(40%), 여가에 33.5분(39%), 돌봄에 5.2분(6%)을 소비했다. 27개국 평균에 비하면 한국 직장인은 출·퇴근이 줄어든 시간을 업무와 여가에 더 많이 사용하는 반면 돌봄에 쓰는 시간은 크게 적었다.
재택근무로 생긴 여유시간을 일하는 데 가장 많이 할애한 국가는 대만, 싱가포르, 말레이시아로 아시아권 국가들이 주를 이뤘다. 모두 여유시간의 53%를 업무하는 데 사용했다. 싱가포르의 경우 재택근무를 하면서 통근 시간 94분을 절약했지만, 절반 이상인 49.8분이나 일하는 데 사용했다. 여유시간을 일보다 여가에 더 많이 쓰는 국가는 주로 유럽 국가였다. 다만 일본도 100분의 여유시간 중 업무에 32%, 여가에 39%를 소비해 아시아 국가에서는 예외적인 양상을 띠기도 했다.
일각에서는 재택근무로 출·퇴근 부담이 사라지면서 수면 시간이 늘었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집에서 노트북을 켜는 것만으로 출근이 가능한 만큼 침대에서 조금 더 눈을 붙일 수 있기 때문이다. 미국 뉴욕 연방준비은행이 지난해 10월 공개한 자료를 보면 미국 직장인의 수면 시간은 1시간 정도 늘어난 것으로 집계됐다. 여가시간도 증가했는데 연령대에 따라 청년층은 사교 모임, 운동 시간 등이 늘었다고 답한 경우가 다수였던 반면 고연령층은 육아나 집안일 등이 늘었다고 답하기도 했다.
재택근무를 하게 되면 직원 입장에서는 이렇듯 여유시간이 생긴다. 그중 절반을 업무에 쏟는다 해도 나머지 절반은 마음대로 활용할 수 있다. 무엇보다 월급 받는 직장인으로서는 통근이라는 행위 자체가 자신의 시간과 노력이 투입되는 일종의 투자 비용인 만큼 이를 절약할 수 있다. 코로나19 사태가 발생하기 이전에는 사무실 출근이 당연했던 만큼 직원이 출·퇴근 비용을 직접 체감하는 경우가 드물었다.
하지만 팬데믹 이후 상황이 달라졌다. 출·퇴근 이슈는 회사와 직원이 재택근무의 생산성을 판단할 때 큰 입장차가 생기는 요소 중 하나가 됐다. 직원의 마음과는 달리 회사는 출·퇴근하는 시간을 업무의 일종이라고 보지 않는다. 통근하는 시간에 실제 업무를 해 성과를 내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회사 경영진과 직원의 이러한 입장 차가 사무실 복귀를 막는 요인으로 작용한다는 평가도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한번 들여다볼 법한 주장이 있다. 니콜라스 블룸 스탠퍼드대 교수와 호세 마리아 바세로 멕시코자율공과대(ITAM) 교수, 스티븐 데이비스 시카고대 교수 등은 지난 1월 5일 하버드비즈니스리뷰(HBR)에 올린 글에서 관리자와 직원들이 생산성을 판단하는 데 있어 출·퇴근 시간 포함 여부를 두고 기본적인 관점 차이가 있다고 분석했다.
연구진은 코로나19 사태 이전 하루에 9시간 근무, 1시간 출·퇴근을 하는 직장인이 1000달러(약 130만원)의 급여를 받는다는 가상의 예시를 제시했다. 이 예시에서 직원은 출·퇴근 시간까지 고려해 자신의 시간당 급여가 100달러라고 판단한다. 일반적으로 시간당 급여를 평가할 때 출·퇴근 시간은 포함하지 않지만, 직원 입장에서 자신의 시간과 비용, 에너지를 감안해 계산한다고 보는 것이다. 같은 조건에서 관리자는 통근 시간을 제외하고 계산해 직원이 시간당 111달러를 생산한다고 평가한다.
여기서 재택근무를 하게 되면 근무 시간과 통근 시간을 모두 합친 업무 관련 시간은 직원과 관리자가 동일하게 총 9시간으로 계산하게 된다. 직원은 출·퇴근 시간이 빠져 총 10시간에서 9시간으로 줄어들게 되고 이들이 판단하는 시간당 급여는 111달러로 올라간다. 관리인은 기존에도 통근 시간을 포함하지 않기 때문에 시간당 급여는 변화가 없다.
하나의 가정을 추가해 만약 재택근무를 이유로 직원의 하루 급여를 1000달러에서 950달러로 줄인다면 어떻게 될까. 출·퇴근 없이 9시간을 근무하니까 시간당 급여는 106달러로 계산된다. 직원은 재택근무 이전 급여였던 기존 100달러보다 큰 만큼 생산성이 더 올라갔다고 볼 수 있지만, 관리자는 기존 111달러에서 106달러로 생산성이 줄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연구진은 "가상의 사례이고 실제 많은 근로자들이 이런 방식으로 계산을 하진 않는다"면서도 "그럼에도 출퇴근 여부가 생산성에 대한 양 측의 입장차를 설명해준다"고 설명했다.
그렇다면 출·퇴근 문제는 고통을 주는 요인이기만 할까. 최근 출·퇴근 과정이 업무 공간과 분리하는 시간을 갖게끔 해 직장인에게 심리적으로 회복의 시간이 되기도 한다는 논문이 나왔다. 코로나19 시대에 확산했던 재택근무가 일상생활과 업무의 분리가 잘 되지 않아 직장인을 '번아웃'으로 이끈다고 지적받았던 것을 감안하면 이해가 가는 부분이다.
미 러트거스대 크리스피 맥알파인 교수 등은 지난해 10월 내놓은 논문에서 출·퇴근 자체가 시간이나 공간적인 변화에 맞물려 있는 경계 지점을 의미하는 '경계 공간(liminal space)'이라고 평가했다. 회사나 가정에서 모두 자유로운 공간이자 시간인 만큼 이 과정에서 심리적으로 업무를 마무리 짓거나 집안일을 끊어내고 정신을 회복할 수 있다는 의미다.
맥알파인 교수는 이를 위해서는 통근길에 업무와 관련한 고민을 하기보다는 팟캐스트를 듣거나 좋아하는 노래를 들으며 휴식을 취하는 것이 좋다고 제시했다. 또 카풀 등을 활용해 출·퇴근 시간에 다른 사람들과 대화하며 사회생활을 하는 시간을 갖거나 누군가와 전화 통화를 하는 것도 심리적 분리를 만들 수 있는 좋은 방법이라고 했다.
맥알파인 교수는 미 공영 라디오 NPR과의 인터뷰에서 자신이 논문을 발표한 뒤 분노로 가득찬 직장인들로부터 '기업으로부터 돈 받았냐'는 원성을 들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통근이 좋다고 말하는 게 아니다. 출·퇴근 자체가 긍정적인 면이 있을 수 있고 이를 해야 할 때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생각해보자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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