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병희의 갤러리 산책] 인간 백남준, 예술가 백남준

임영균 사진전 '백남준, 지금 여기'…이길이구 갤러리에서 25일까지

Nam June Paik in his Studio

Nam June Paik in his Studi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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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박병희 기자] 파르라니 머리를 깎은 중년 남성. 세계적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이다. 앞에 놓인 테이블 위에는 음료수와 맥주병들이 즐비하다. 그는 전화를 받고 있다. 의자에 깊숙이 기대 상체를 한껏 뒤로 눕혔다. 세상 두려울 것 없다는 듯 편안해보인다. 이곳은 미국 뉴욕 소호에 있는 그의 작업실이다. 1983년 6월4일. 그는 귀한 손님을 위해 하루 일정을 비웠다. 오전 10시에 백남준을 찾은 사람은 스물여덟 살 한국인 유학생 임영균이었다.


"처음 작업실을 찾아갔을 때 조그만 상을 차려놓고 기다리고 계셨다. 백남준 선생님 첫마디가 '오늘은 내가 하루 종일 시간을 비워놨으니까. 천천히 이야기도 하고 사진도 찍고 놀다 가면 된다'였다."

사진작가 임영균은 1982년부터 20여년간 백남준의 사진을 찍었다. 그가 찍은 사진을 모은 전시 '백남준, 지금 여기'가 오는 25일까지 서울 강남구 이길이구 갤러리에서 열린다. 대가가 찍은 대가의 모습이다.


임영균은 1955년 대구에서 태어났다. 1973년 전국학생사진전에서 최고상인 문화공보부 장관상을 받았다. 중앙대학교 사진학과를 졸업한 뒤 국비로 미국 유학을 다녀왔다. 뉴욕대학교 예술대학원을 졸업했고 뉴욕 국제사진센터(ICP)에서도 공부했다. 고(故) 김영삼 전 대통령의 1998년 연하장 사진을 찍었고 1999년 영국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경북 안동 하회 마을을 방문한 모습도 담았다.

Nam June Paik in his Studio.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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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영균은 1981년부터 백남준에게 전화를 걸었다. 한 번 작업실로 찾아가 인터뷰도 하고 사진도 찍겠다고 했다. 당시 백남준은 독일 뒤셀도르프에서 강의를 했다. 방학 때에만 뉴욕에 있었다. 봄에 전화하면 "어~ 가을에 다시 전화해"라고 했고 가을에 다시 전화하면 "어~ 내년 봄에 다시 전화해"라고 했다.


"좋은 말로 거절하시는 건가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는데 그렇게 생각하기에는 너무 반가워하는 목소리였다. 1983년이 돼서야 작업실로 초대를 받았다."

임영균은 백남준이 하루 종일 시간을 비워놨다는 말에 안도했다. "사실 사진을 찍기보다 시간을 잡기가 더 어렵다. 여유 있게 시간을 배려해주셔서 고마웠다." 그는 오전 11시쯤에야 "사진 찍어도 되겠습니까"라고 묻고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어둑어둑해질 무렵 작업실을 나왔다. 백남준이 임영균을 배웅하러 따라나섰다. 건물 밖으로 나와 인사를 했는데 백남준이 몇 걸음 더 따라왔다. "선생님, 사진을 한 장 더 찍어도 될까요?" 백남준은 겸연쩍게 머리를 긁적였다. '찰칵.' 슬리퍼에 낡은 체크무늬 바지, 바지 바깥으로 삐져나오고 단추도 제대로 채우지 않은 흰 셔츠. 그렇게 임영균은 인간 백남준을 자신의 카메라에 담았다. 두 사람의 나이차는 스물세 살. 임영균은 백남준을 "너무 정이 많은 분"으로 기억했다.

PAIK NAM JUNE in front of his studio

PAIK NAM JUNE in front of his studi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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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영균은 1988년에 귀국했다. 백남준은 그의 귀국을 말렸다. 한국은 아직 예술가가 인정받고 생활하기가 쉽지 않다는 이유에서였다. 임영균은 귀국을 미룰 수 없는 상황이었다. 백남준이 마지막으로 밥이나 먹자며 임영균을 불러냈다. 그때 백남준은 임영균에게 편지 두 통을 건넸다. 하나는 서울에 있는 자신의 누나에게 쓴 편지였다. 임영균에게 서울에서는 네가 지낼 곳이 없으니 자신의 누나 집을 찾아가라고 했다. 다른 하나는 정기용 원화랑 대표에게 쓴 추천 편지였다.


전시 사진 중에는 1982년 6월 뉴욕 휘트니 뮤지엄에서 열린 백남준의 첫 회고전 사진도 여러 장 있다. '백남준의 뮤즈'로 불린 첼리스트 샬럿 무어먼의 사진이 여럿이다. 백남준이 웃옷을 벗고 무어먼의 첼로가 되는 퍼포먼스를 한 사진은 유명하다.


이번 전시에서는 임영균이 세계 각지를 여행하며 찍은 사진 여덟 점도 전시된다. 미국 뉴욕, 일본 교토와 오사카, 체코 프라하,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중국 항저우에서 찍은 사진들이다. 여덟 점 중 한 점은 해남에서 찍었다. '해남 1999'라고 제목을 붙인 이 사진은 지난해 미국 뉴욕주의 조지 이스트만 코닥 사진박물관 '사진의 역사'에 전시됐다. 코닥박물관은 사진을 40만여점이나 소장하고 있는 세계 최대의 사진 박물관이다. 20세기 사진사에서 중요한 작품 약 30점을 골라 '사진의 역사' 전시를 하고 있다.

Haenam,Korea,1999..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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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병희 기자 nut@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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