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사우디 언론인 피살 사건이 남긴 교훈

서방 세계로 망명해 반정부 비판 활동을 벌이던 사우디아라비아 언론인 자말 카슈끄지가 의문의 최후를 맞았다. 불과 3주 전 카슈끄지가 터키 주재 사우디 영사관에 서류 업무차 들렀다가 실종된 터라 많은 이는 사우디 정부가 눈엣가시처럼 여기던 반체제 언론인을 의도적으로 살해한 것으로 본다. 터키 정부의 발표에 따르면 카슈끄지가 실종된 날 사우디 관리, 법의학자, 군 장교 등 15명이 이스탄불 공항에 전세기 편으로 출입국한 기록이 있는데 이들이 모종의 암살 내지 처형 임무를 끝내고 돌아간 것으로 의심받고 있다.

당초 카슈끄지가 영사관에서 무사히 걸어나갔다며 오리발을 내밀던 사우디 정부가 갑자기 태도를 바꿔 그의 죽음을 인정한 것도 의문투성이다. 사우디 정부의 발표에 따르면 영사관에서 카슈끄지와 누군가 사이에 말다툼 끝에 주먹다짐이 벌어졌고 그 과정에서 사고로 숨졌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어이없는 얘기다. 마치 '탁' 하고 치니 '억' 하고 쓰러져 숨을 거뒀다는 권위주의 정권 시절 한국 경찰의 발표와 크게 다를 바 없다.사우디 언론인 피살의 배후로는 권력을 차지한 뒤 측근들을 숙청하고 반체제 인사들을 탄압해온 최고 통치자 무함마드 빈 살만 알 사우드 사우디 왕세자의 이름이 거론된다. 그러나 사우디 정부는 관료를 포함해 10여명을 해임하거나 처벌하는 선에서 이 사건을 덮으려 한다.

해외로 망명한 반체제 인사들에 대한 암살이나 납치 시도는 결코 남의 일이 아니다. 권위주의 정권이 군림하던 시절 우리나라에서도 정보기관원과 외교관들이 연루된 김대중 납치 사건이 일본에서 벌어졌고, 미국 의회 청문회에 나가 당시 한국의 권위주의 정권에 대해 비판한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이 프랑스 파리에서 실종되기도 했다. 동남아시아를 떠돌며 북한 정권에 냉소적이던 망명객 김정남(고(故)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의 장남)이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 공항에서 독극물 공격으로 살해된 것도 불과 지난해 초의 일이다.

권위주의 정권이 통치하는 나라에서 반체제 인사나 언론인에 대한 납치나 암살은 흔한 일이다. 국제 비정부기구(NGO)들의 통계에 따르면 러시아에서는 지난 20여년간 200명이 넘는 반체제 언론인이 살해됐다. 총격, 납치, 교통사고, 실족 추락 등 사망 원인도 각양각색이지만 언론인을 죽인 범인이 검거되거나 기소된 사례는 거의 없다. 언론 감시 국제기구들은 러시아 외에 중국, 이집트, 멕시코, 이라크 등도 다수의 언론인이 살해되거나 실종되는 대표적인 나라로 꼽고 있다.언론 자유 옹호 단체인 국경없는기자회(RSF)가 발간한 국가별 언론 자유 순위를 살펴보면 사우디는 최하위권인 169위에 머물러 있다. 언론 탄압 국가인 북한이 꼴찌인 180위인 것을 감안하면 사우디 언론인이 해외의 자국 영사관에서 어이없이 목숨을 잃은 것도 그리 놀랄 일이 아니다. 정치권력이 언론 자유를 제약하는 데는 여러 방법이 동원된다. 노골적으로 기사를 검열하고 언론사를 상대로 세무조사를 벌이거나 비판적인 언론인들을 겁박한다. 무엇보다 가장 비열하고 극악한 언론 통제는 언론인들을 살해하는 것이다. 최근 우리가 언론 보도를 통해 알게 된 사우디 언론인의 비참한 최후가 바로 생생한 사례다.

미국 정부는 23일(현지시간) 사건 관련 용의자 21명에 대한 비자를 취소했지만 사우디 정권에 대해서는 별다른 제재 조치를 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사우디가 미국산 방산 물자와 소비재를 사들이는 믿음직한 동맹이자 월 스트리트를 주름 잡는 큰손이기 때문이다. 특히 동맹 관계를 금전 거래와 동일시하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에게는 더욱더 그렇다.

김헌식 미국 콜로라도대학교 언론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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