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 애가 왜 그렇게"…초등학생들이 말하는 '성차별'

'남자답게 여자답게' 어른들이 주입하는 고정관념
인터넷·유튜브서 쏟아지는 욕설·혐오표현이 유행어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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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조인경 기자] "태권도장에서 겨루기를 하다가 친구 발에 얼굴을 세게 맞았어요. 너무 아파 눈물이 났는데, 관장님이 남자가 뭘 질질 짜냐고, 그만 울라고 해서 억울했어요. 여자애들이 맞아서 울었으면 혼내지 않고 달래주셨을 꺼에요."(경기 W초등학교 5학년 A군)"식구들이 다 같이 모인 자리에서 할머니가 저한테 다리 모으고 앉으라고, 여자는 다리를 쩍 벌리고 앉으면 안된다고 하셨어요. 할 수 없이 다리를 모으고 앉았는데 왜 나한테만 그러시는지 속상했어요."(인천 H초등학교 5학년 B양)

"엄청 무거운 물건을 못들고 있으니까 여자애들이 남자가 왜 이렇게 힘이 없냐고 놀려서 기분이 나빴어요. 그 여자애들이 저보다 힘이 더 쎈데… 여자가 힘이 약할 땐 놀리지 않잖아요."(인천 H초 C군)

초등학교 5학년 남·녀 어린이들이 잇따라 털어놓는 성차별 경험이다. 아이들은 학교에서, 학원에서, 놀이터에서조차 남자는 이러해야 한다, 여자는 저래야 한다는 성별 고정관념에 맞닥뜨리고 있었다. 어른들이 무심코 던진 말이 부당하고 불편하다고 느끼지만 스스로의 목소리를 내기엔 아직 어리고, 무심결에 그런 편견들을 배우고 주입받고 있기도 했다.D양(경기 W초 5학년)은 학급 출석번호를 남자는 1번부터, 여자는 41번부터 매겨 정하는 게 부당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남녀 상관 없이 가나다 순번으로 하면 좋겠다"고 말했다.

B양은 2학년 때 담임선생님에게 "여자애가 왜 이렇게 글씨를 못쓰냐"고 야단 맞은 기억을 끄집어 냈다. 동네에서 지나가는 어른에게 "여자가 깨끗해야지…"라고 핀잔을 들은 적도 있었다.

6학년 언니들이 4학년 남자아이들과 축구를 하려고 할 땐 "여자는 (축구를) 잘 못해서 안껴준다"는 말을 들었다. 남학생들은 온라인 게임에서조차 랜덤으로 만난 팀원 가운데 여자가 있으면 '(게임을) 잘하지 못할테니 빠지라'고 요구하거나 다른 캐릭터를 고를 것을 강요한다고 했다.

반면 남학생들은 남학생대로, 무조건 강해야 하고 참아야 하는 게 억울할 지경이다.

B군은 뭔가 서운한 일이 있어 집에서 눈물을 보였다가 엄마, 아빠에게 '남자가 겨우 그런 일로 울고 그러냐'는 놀림을 들었다. "남자도 울고 싶을 땐 좀 자유롭게 울 수 있지 않느냐"는 게 B군의 항변이다.

A군은 "여자애들이 만날 남자애들을 때려서 어떤 땐 팔에 멍이 들 정도인데, 남자는 여자를 때리면 안되니까 맞기만 한다"고 토로했다. 한번은 장난이 심한 여자친구의 어깨를 툭 쳤는데, 이 친구가 선생님께 이르는 바람에 본인만 야단 맞았다고 한숨도 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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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에서의 이같은 성 고정관념과 차별은 '언어'에도 그대로 반영된다. 특히 초등학생들에게 인기가 많은 인터넷 게임이나 유튜브 크리에이터(BJ)들이 쓰는 유행어, 욕설은 이미 초등학생들 사이에 만연하다.

초등학교 고학년쯤이 돼 스마트폰을 갖게 되는 아이들이 많아지면서 인터넷 상에서, 또는 친구들을 따라 자연스럽게 욕설이나 혐오표현을 접하게 된다. 이 가운데는 여성을 비하하는 내용이 유난히 많다.

최근엔 인기 유튜버 '보겸'이 자신의 이름과 '하이루'를 합쳐서 만든 인삿말 '보이루'가 여성을 비하하는 말로 사용돼 문제가 됐다. 어린 학생들 사이에 일본 음란물에서 유래했다는 '앙 기모띠'나 '못생긴 얼굴'을 뜻하는 '와꾸' 같은 말이 나돌자 학교에선 이런 말을 쓰지 못하도록 금지한 교사도 있다.

부모를 욕한다는 소위 '패드립'도 수위가 심각해지고 있다. 상대의 말을 무시하며 딱 자를 때 쓰던 "응 아니야~"라는 유행어는 한 때 "응 니 애미"라고 변질되더니, 최근엔 "응 니 며느리"로 바뀌었다. 어머니를 비하하는 나쁜 말이라는 인식이 퍼지자 '애미'를 '며느리'라고 바꾼 것인데 이 또한 가족 중에서도 유독 여성을 얕잡아보는 인식이 깔려 있기 때문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물론 아이들은 별 뜻 없이, 그저 인터넷이나 친구들이 쓰는 말을 따라했을 뿐이다.

B양은 "학년이 올라갈수록 '말빨'도 세지고, 유튜브를 더 많이 봐서 그런 나쁜 말들도 더 많이 듣고 알게 된다"고 했다. 저학년 동생들은 이런 언니오빠의 말투를 보고 배운다.

A군은 "유튜버가 많아지고 그들 사이에서 경쟁이 치열해지자 사람들의 주목을 받으려고 더 자극적인 말들을 쓰고 있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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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현백 여성가족부 장관은 지난 22일 이들 초등학생들과 만나 어린 학생들이 사용하는 성차별적인 언어, 여성비하 표현들의 실태에 대해 청취했다. 여가부는 다음달 중·고등학생, 청년 등과도 만나 성차별 언어표현 경험과 해결방안에 관한 집담회를 갖고 이를 개선하기 위한 정책 방안을 마련할 예정이다.




조인경 기자 ikjo@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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