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동여담] 1987

[아시아경제 류정민 기자] "칠흑 같은 밤 쓸쓸한 청계천 8가, 산다는 것이 얼마나 위대한가를…." 1980년대 정서가 살아있던 시절 록밴드 '천지인'은 서정적인 멜로디의 '청계천 8가'라는 노래로 사랑을 받았다.

군가 스타일 민중가요가 대세를 이루던 시절에 내놓은 발라드풍 노래였다. 어쿠스틱 기타 반주에 은은하게 울려 퍼지는 청계천 8가는 듣는 이의 마음을 울리기 충분했다. 청계천 8가는 공간에 대한 복합적인 상징성을 담은 노래다. 수많은 공구 상가와 노점상은 청계천의 겉모습을 보여줄 뿐이다. 청계천은 '땀의 노래'가 배어 있는 공간이다. 서민의 삶과 애환이 그 곳에 고스란히 녹아 있다.
사진=영화 1987 포스터

사진=영화 1987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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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청계천은 한국 현대사의 흔적을 간직한 공간이다. 1980년대 청계천 인근 종로 일대는 형형색색 깃발이 넘실대는 공간이었다. 민주와 인권이라는 가치가 짓밟히던 시절 수많은 시민이 저항의 물결을 형성했다. '호헌철폐, 독재타도' 사박자 구호는 커다란 파도가 돼 청계천과 종로 골목 곳곳에 스며들었다.

거리를 메웠던 인파가 썰물처럼 빠져나간 청계천의 밤은 인생의 의미를 되새기는 공간으로 재탄생한다. 길가에 늘어서 있는 포장마차에서 한잔 술을 기울이다 보면 청계천은 새로운 아침을 맞았다. 역사라는 게 특별할 게 있는가. 민초(民草)의 땀과 눈물, 삶의 노래가 어우러지면 그게 바로 우리의 역사 아니겠나. 최근 개봉한 영화 '1987'을 보며 느낀 것도 그 부분이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모티브로 한 그 영화는 한국 현대사의 전환점을 이룬 사건을 조명한다. 대공수사관, 공안검사, 대학생, 기자, 교도관 등 다양한 캐릭터가 등장해 현대사의 민낯을 드러낸다.

1987은 '특별한' 이들의 '특별한' 얘기가 아니다. 청계천이 그러하듯 1987도 이름 모를 수많은 이가 공유해야 할 가치이자 삶의 그림자다. 잠시라도 아스팔트 열기를 느껴봤던 사람이라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마음으로 지지를 보낸 사람이라면 누구나 주인공이 될 자격이 있다는 얘기다.

30년 전 청계천 일대의 함성과 2016년 광화문 밤을 밝혔던 거리의 함성은 시대를 초월해 교감한 것은 아닐까. 나의 작은 발걸음과 외침이 역사 발전의 소용돌이를 일으키는 실마리가 될 수 있다는 상상, 우리는 이미 그 상상을 현실에서 경험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류정민 건설부동산부 차장 jmryu@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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