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이 쓸쓸한 밤…' 스물셋 기형도가 건넨 미발표 연시(戀詩) 공개

[아시아경제 장인서 기자] 요절한 천재 시인 기형도(1960~1989)가 쓴 미공개 시 3편이 처음으로 공개됐다.

박인옥 한국문인협회 안양지부장은 20대 초반이던 기형도 시인이 술값을 대신 내준 여성에게 선물한 미공개 연시(戀詩) 3편을 19일 공개했다. 이는 앞서 작가 성우제씨가 지난 13일 공개한 시 1편을 포함한 것이다. 박 지부장은 "지난 2014년 상가집에서 그 여성분을 30년 만에 다시 만났다"면서 "그 분도 오랜만에 옛날 생각이 나서 집에 돌아가서 서재를 뒤적이다가 1989년 유고 시집에 풀로 붙여놓은 시 3편을 발견했다더라"고 했다. 기 시인으로부터 연시를 받은 여성은 수리문학회 동인 중 한 명의 여동생으로 현재는 50대 중반의 평범한 주부다. 다음은 박 지부장이 공개한 시 내용이다.

'당신에게 /오늘 이 쓸쓸한 밤 /나지막하게 노크할 사람이 /있읍니까 /하늘 언저리마다 /낮게 낮게 눈이 꽂히고 /당신의 찻잔은 /이미 어둠으로 차갑게 식어 있읍니다 /그대여, 옷은 입으십시오 /그리고 조용히 통나무 문을 여십시오 /나는 그대에게 최초로 /아름다운 한 점 눈(雪)으로 /서 있을 것입니다.'

'당신이 /외투 깃을 올릴 때 /무엇이 당신을 /차갑게 하는지 두렵게 하는지 /알고계세요? /풀잎은 모두 대지를 향해 /지친 허리를 누이는 밤 /아, 하루에도 언제나 /긴 강은 소리없이 흐르고 /그 강물에 당신의 영혼이 /미역을 감는 밤 /아세요. /나는 언제나 당신의 주위에서 /튀어올라 물보라치는 /물비늘임을 그대는 아세요?'박 지부장은 "당시 경기도 광명에 기형도문학관 건립에 대한 얘기가 오가던 중이라 일단 공개하지 말고 갖고 있다가 문학관이 개관하면 기증하기로 했다"고 설명했다.

작가 성우제씨는 지난 13일 자신의 블로그에 기 시인의 미공개 육필 원고를 공개하며 기 시인과의 인연을 회고했다.

성우제 작가가 지난 13일 블로그에 공개한 기형도 시인의 육필 원고.

성우제 작가가 지난 13일 블로그에 공개한 기형도 시인의 육필 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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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에 거주하는 성씨는 기 시인의 연세대 동문이자 친구였던 소설가 성석제의 동생이다. 성씨는 국내에서 주간지 기자를 지낸 뒤 캐나다로 이주해 저술활동을 펼치고 있다. 그는 고교시절부터 자기의 집에 드나들었던 기 시인을 '형도 형'으로 불렀다고 한다.

시는 1982년 기 시인이 대학 휴학 후 안양에서 방위병으로 생활하던 시절에 쓴 것이다. 기 시인은 당시 '수리문학회' 회원들과 자주 어울렸다. 성씨는 "그즈음 젊은 사람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주머니에 돈이 없었다"면서 "여자 회원들이 술값을 내주면 형도 형은 보답으로 연시인지 연서인지를 써주었다(고 한다)"고 설명했다.

'당신의 두 눈에/ 나지막한 등불이 켜지는/ 밤이면/ 그대여, 그것은/ 그리움이라 부르십시오/ 당신이 기다리는 것은/ 무엇입니까, 바람입니까, 눈(雪)입니까/ 아, 어쩌면 당신은 저를 기다리고 계시는지요/ 손을 내미십시오/ 저는 언제나 당신 배경에/ 손을 뻗치면 닿을/ 가까운 거리에 살고 있읍니다'

이 시 역시 같은 여성에서 선물한 것으로 전해졌다. 시가 적힌 종이는 박 지부장이 공개한 시 2편과 함께 오는 10~11월 경기 광명시에 설립되는 기형도문학관에 기증될 예정이다.

기 시인은 연세대를 졸업한 198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1984년부터 일간지 기자로 일하며 활발하게 작품 활동을 했으나 1989년 29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장인서 기자 en1302@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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