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한詩] 마포우체국/노향림

마포 새우젓 동네의 마지막 보루였던
옛 우체국이 간밤 통째로 사라졌다.
'철거 중' 팻말 하나 없이
누구는 공중 부양된 것을 보았다 하고
누구는 땅속 깊이 주저앉아 버렸다고 한다.
사방 빙벽처럼 둘러서 있는 초고층 유리벽 건물들 사이
반딧불이같이, 희미한 등대같이
한밤중까지 불빛 깜박이던 납작 집 한 채.
온다 간다는 말도 없이 사라져 버린 것.

에메랄드 빛 하늘 훤히 내다보며
청마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편지를 써 보냈다는
우체국 창문.
나는 한정판 첫 시집을 소중히 안아 들고
육필로 정성껏 쓴 봉투에 일일이 우표를 붙여
발송했었다.
내 분신들이 시인이 사는 곳 잘 찾아 나설까
돌아선 발걸음이 잘 떨어지지 않고
자꾸만 뒤돌아보며 설레게 했던 곳.포클레인, 덤프트럭 한 대도 보이지 않는다.
퇴적층처럼 쌓인 잔해 속에 다만 깨진 화분 하나
납작 엎드려 있다.
대낮의 햇살에 초록 인광 번뜩이는 남천이다.
넘어진 바닥에서도 손가락만 한 이파리에
선연한 핏방울 흘리며 나 살아 있어요 외치듯
흔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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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얼핏 알기로 이 시를 쓴 노향림 시인은 마포에서 수십 년을 살아오신 분이다. 그리고 내가 몇 년 전 문득 보았던 마포우체국은 그래도 꽤 큰 5층짜리 건물이었는데, 지금은 그마저도 허물고 지하 6층, 지상 16층으로 재건축 중이라고 한다. 그러니 이 시에 등장하는 "반딧불이같이, 희미한 등대같이/한밤중까지 불빛 깜박이던 납작 집 한 채"는 아마도 내가 보았던 5층짜리 건물보다 훨씬 오래전의 것일 것이다. 장소는 어떤 기억을 동반하기 마련이다. 청마 유치환 시인이 "사랑하는 사람에게 편지를 써 보냈"듯, 노향림 시인이 "한정판 첫 시집을 소중히 안아 들고/육필로 정성껏 쓴 봉투에 일일이 우표를 붙여/발송했"듯, 그 어느 누군가도 마포우체국을 들어서며 간절했을 것이고 다정했을 것이고 애틋했을 것이다. 그런 곳이 어디 마포우체국뿐이겠는가. 우리가 이 도시에서 허문 것은 단지 건물이 아니라, 그곳에 깃든 추억들이고 마음들이고 사연들인 셈이다. 그리고 그 마음들과 사연들은 한번 허물어지면 결코 복원할 수 없는 것들이다. 무엇이 참으로 소중한가.

채상우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