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보기의 책보기] 말하라, 어두워지기 전에

말하라, 어두워지기 전에

말하라, 어두워지기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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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칼럼 '최보기의 책보기'를 시작한 이후 유일하게 다루지 않았던 분야가 '시'였다. 문학을 회피했던 이유는 '문학평론'을 할 깜냥에 깜냥도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서였다. 그나마 산문인 에세이는 감상평으로 자주, 소설은 독후감 정도로 간간이 다루기도 했지만 시집만큼은 예외였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또는 지껄이는지 모르겠는 시인의 말에 대해 평범한 독자로서 뭐라고 말을 한다는 것이 불가능해서다.

첫 서평 칼럼의 대상은 '뿌리깊은나무'의 발행인 고 한창기 선생의 삶을 후진들이 회고하는 <특집! 한창기>였다. 글을 쓰든, 책을 내든, 무슨 일을 하든 한 선생만큼의 열정이 아니면 아예 덤비지 말라는, 그 정도 열정이면 무엇을 해도 실패하지 않으리라는 메시지를 나와 타인들에게 전하고 싶어서 애써 고른 책이었다. 그리고 이번에 고른 책이 노혜경의 <말하라, 어두워지기 전에>인데 드디어(?) '시집'인 것이다.왜 하필 이때 시집이 찾아왔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파울로 코엘료가 <연금술사>에서 말한 삶의 섭리 '마크툽'을 신봉할 뿐이다. '시'가 궁금해 480페이지에 이르는 오규원 시인의 <현대시작법>을 몇 달 동안 뒤적였으니까. 더불어 고 한창기 선생과 현존하는 노혜경 시인을 잇는 사람과 시대의 끈 또한 전혀 의미 없는 우연의 낚싯줄은 아닌 것 같으니까.

노혜경의 시인의 옛 시 '슬퍼할 권리'를 애송하게 된 것은 아주 오래 전이었다. 물론 '하도 오래 살았더니 울고 싶은 일이 너무 많아. 그러니 누가 나를 좀 안아다오. 그 가슴을 가리개 삼아 남의 눈물을 숨기고 죽은 듯이 좀 울어 보게'라는 시구를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다. 바람결이 전해왔다. 간만에 돌아온 시인이 이번에는 달달한 '연애시'를 낼지도 모른다고. 육십 가까운 여류시인의 농익은 사랑시가 기다려졌다. 박재삼 '사랑이여', 김춘수 '꽃'은 아니더라도 도종환의 '접시꽃 당신'이나 곽재구의 '사평역에서'는 기대했다.

때문에 그녀의 신작 시집 <말하라, 어두워지기 전에>는 '때 늦기 전에 사랑한다고 말하라'는 정도로 아주 쉽게 생각했다. 예상은 적중하지 못했다. 첫 시 '강으로 가기'부터 섬뜩하고 우울했다. '시집을 고르는 게 아니었는데…' 후회가 들었다. 시집 딱 중간에 자리 잡은 '로자 룩셈부르크'에 이르러서야 후회는 철회됐다. 시인은 여전히 굳센 결기와 희망을 노래한다.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딛고 '굳센 어깨가 허물어지고 있다. 말하라, 내가 가고 있다고' 의연 당당하게 깃발 흔든다.김수영의 '시여, 침을 뱉어라'를 다시 본다. "시작은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고, <심장>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 <몸>으로 하는 것이다. <온몸>으로 동시에 밀고 나가는 것이다. 나도 여러분도 시작하는 것이다. 모기 소리보다도 더 작은 목소리로 아무도 하지 못한 말을 시작하는 것이다. 아무도 하지 못한 말을. 그 말을" 노혜경 시인이 '평택 가는 사이렌' 소리로 하고 있다.

'주인님인 역사가 나를 개 패듯 팬다. 내가 개임을 알라고. 그래서 다시 물어야겠다. 주인 놈의 손등을 멱을 드디어 두 발로 일어서야겠다"는 노혜경 시인이야말로 우리 시대 진정한 참여시인이다. '질주하는 표범'이다. 시인의 신작 시집을 빌어 '문학'으로 진입하는 '최보기의 책보기'도 자축한다.

<노혜경 지음/실천문학사/8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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