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대박물관의 '근역강산 맹호기상'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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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 한 마리가 벼랑을 할퀴고 있다. 눈은 무섭게 치뜨고 입은 포효를 하는 듯 벌리고 있으며 굽힌 왼 앞발과 펼친 오른 앞발의 발톱이 금방이라도 생채기를 낼 듯 날카롭다. 뒷발의 한쪽은 배 앞으로 나와 있고 왼쪽 뒷발은 바다를 단단히 딛고 온몸을 미는 탄력을 만들어내고 있다. 가장 인상적인 것은 오른 앞발과 목덜미와 등줄기를 이루는 생동감있는 곡선일 것이다. 황금빛 털 위에 가로로 펼쳐진 검은 호피문(虎皮紋)이 꿈틀거리는 듯하다. 꼬리는 부드럽게 감겨 아랫배 쪽으로 밀었다. 이미 외형이 정해져 있는 틀 속에 들어앉아야 했을 이 맹수는 그 자태가 자연스러워 지도와는 상관없는 맹호도(猛虎圖)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 그림은 어떻게 생겨난 것일까.조선시대 초기엔 한반도 형상을 '중국을 향해 고개 숙이며 읍(揖)하는 노인의 모습'이라고 생각했다. 사대(事大) 사상이 지도를 읽는 눈에도 반영된 셈이다. 한반도를 토끼로 읽어낸 사람은 1903년 조선전도(全圖)를 제작한 일본 도쿄제국대학의 고토 분지로(小藤文次郞) 교수다. 긴 귀를 붙잡힌 토끼가 대륙에 붙잡혀 달랑 들려 올려진 듯한 느낌은, 그냥 봐도 썩 유쾌하지 않다.
이런 생각을 한 사람 중에 18세 소년 최남선(1890~1957)도 있었다. 그는 1908년 '소년'이란 잡지를 창간하면서 한반도 지도의 형상 안에 호랑이를 그려넣는 아이디어를 냈다. 이 기발한 지도는 당시 식민지 우국지사들의 심금을 울렸다.
최남선의 '호랑이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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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머리에 묘사한 호랑이 지도는 고려대박물관에 있는 '근역강산 맹호기상(槿域江山 猛虎氣像)'이란 이름의 그림이다. 20세기 초반(정민 교수는 작가가 김태희라고 밝히고 있다)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하는데 아마도 최남선의 호랑이가 나오고 난 다음에 그려진 작품일 듯하다. 한편 한반도의 형상을 호랑이로 본 것이 최남선이 처음이 아니라는 주장도 있다. 포항 대보리의 호미(虎尾ㆍ호랑이 꼬리)곶이란 명칭이 최남선 이전에도 있었다는 것이다.
지도는 지도일 뿐이다. 그 경계를 이룬 선 속에 무엇이 들어있는지를 상상하는 일은 그야 말로 '마음의 눈'이 그리는 그림일 뿐이다. 하지만 세상의 모든 형상에는 뜻이 있다는 말도 있다. 그런 형상이 빚어지려면 그 내면 속에 뜨겁고 옹골찬 기운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지도 속의 이 호랑이는 이 땅의 겨레붙이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말 없는 웅변이리라.
빈섬 이상국(편집부장ㆍ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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