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할퀸 것은, 공중(公衆)에 드러난 성인 남자의 성기가 아니라 여자의 주변에 널브러져 있던 짐이었다. 소지품이 쏟아져 나온 가방, 구겨진 쇼핑백, 무언가를 동여맨 보자기 꾸러미. ‘보호자’로 아주 긴 시간을 살아온 사람의, 짐작한 일이면서도 다급하지 않으면 안 되는 손놀림이 역력히 남은 짐들이었다. 사람이 많지 않은 역사였다. 그들이 불편하지 않도록, 아니면 그들이 불편해서 몇몇 사람은 자리를 피해 걸었고 나도 멀찌감치 떨어져갔다. 쳐다보거나 당황한 표정을 지어 그들에게 무례가 되는 일이 없도록 고작 긴장하면서.
하지만 누구의 접근도 부담스럽고 귀찮은 상황은 아니었을까. 이미 스스로 주변에 폐가 되고 있다고 판단해버려서 그냥 이 순간이 빨리 지나가기만을 바라고 있지는 않았을까. 그렇다면 그날처럼, 아무도 그들이 거기 있지 않은 듯 지나쳐주는 것이 여자가 유일하게 원하는 것이었을 수도 있다. 아들의 상태가 낯선 사람이 접근했을 때 어떤 자극을 받아 주변을 더욱 곤란하게 만드는 유형이었다면 더욱, ‘안 도와주는 게 도와주는 것’이 된다. 뭐가 도움이고 뭐가 ‘오지랖’이었을까. 곤란한 상황에 처한 타인이 바라는 것은 무엇인가. 아니, 무엇이 타인이 ‘바라지 않는’것인가. 이런 것을 몇 년간 고민하는 건 무지해서인가 소심해서인가.
이러한 무지(또는 소심) 덕에 사회성 부족을 지적당할 때가 있다. 정(情)이 없다는 힐난으로 연결되기도 한다. 반박하기는 어렵다. 정이라는 둘레 안에서 타인을 염려하고 걱정하는 것, 무엇보다 그것을 표현하는 것을 나는 잘 하지 못한다. 그러나 억울해서가 아니라, 진지하게 항변하고 싶다. 타인이 바라지 않는 것을 헤아리는 능력도 사회성이지 않습니까. 타인이 바라지 않는 것을 하지 않는, 그러니까 어디부터가 오지랖인지 고민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아십니까.
이윤주 에세이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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