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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관료에게도 '뇌물 5금'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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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물죄 수사 받는 대통령과 기업총수들…더덕정승·잡채판서는 '예외'라고 외쳤는데


뇌물은 하나를 얻기 위해 하나를 주는 일에 그치지 않고, 준 것과 받은 것 모두를 잃을 수 있는 도박과 같은 행위이다. 일러스트 = 오성수 작가

뇌물은 하나를 얻기 위해 하나를 주는 일에 그치지 않고, 준 것과 받은 것 모두를 잃을 수 있는 도박과 같은 행위이다. 일러스트 = 오성수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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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디지털뉴스본부 김희윤 기자] 박근혜 전 대통령이 21시간의 검찰 조사를 마치고 오늘(22일) 아침 귀가했다. 전날 14시간에 걸쳐 이뤄진 조사에서 집중적으로 이뤄진 것은 400억 원대 뇌물 혐의였는데 검찰은 이에 앞서 삼성 이재용 부회장과 SK 최태원 회장을 소환, 혐의입증을 위한 사전조사에 나섰다.

돈의 흔적은 남았으되 준 사람은 대가성이 없다 강변하며, 받은 사람은 모르쇠로 일관하는 모습은 스포일러조차 필요 없는 ‘뇌물 서사’의 핵심 전개요소. 지난해 12월 6일 있었던 국정조사 청문회에서 이재용 부회장은 K스포츠 재단 출연 관련 대가성을 묻는 질문에 “뭘 바라고 지원한 적은 없다”고 해명했지만, 박 전 대통령은 2015년 7월 25일 이 부회장과의 단독 면담에서 “승마 유망주를 해외 전지훈련도 보내고 좋은 말도 사줘야 하는데 삼성이 그걸 안 하고 있다”며 최순실의 딸 정유라에 대한 전폭 지원을 압박한 사실이 특검 공소장을 통해 드러난 바 있다.
뇌물공여죄로 구속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뇌물은 하나를 주고 하나를 받는 단순 역학이 아닌 하나를 주고 하나를 얻었다 이내 둘 다 잃을 수도 있는 도박과도 같은 속성을 지니고 있다. 사진 = 아시아경제 DB

뇌물공여죄로 구속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뇌물은 하나를 주고 하나를 받는 단순 역학이 아닌 하나를 주고 하나를 얻었다 이내 둘 다 잃을 수도 있는 도박과도 같은 속성을 지니고 있다. 사진 = 아시아경제 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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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는 사람의 노력, 뇌물

뇌물은 받은 사람보다 준 사람의 공력에 따라 그 사실이 세상에 드러나느냐 영원히 감춰지느냐가 결정되며 내역이 백일하에 드러날 경우 수뢰자의 처벌은 당연지사지만, 준 사람은 받은 ‘대가’는 물론 준 돈도 날리고 처벌까지 받게 되니 여러모로 위험한 역학관계가 아닐 수 없다.

그럼에도 재벌 총수들은 출연한 돈에 대해 하나같이 대가성을 부정함과 동시에 감사표시이자 국가정책을 위한 공여였다는 그럴싸한 포장까지 힘써야 하니 이중고가 따로 없겠으나, 억울함이 크다 하여 본래 그 돈이 가진 뇌물성이 선물로 바뀔 순 없다. 조선 시대에는 이런 사태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암암리에 통용된 뇌물의 마지노선이 있었는데, 시대만 다를 뿐 선물을 가장한 뇌물의 규모와 목적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조선시대 관료사회에서는 뇌물의 하한선으로 통용되는 '다섯들이'가 있었다. 사진 = 신윤복, 聽琴賞蓮, 28.3cm x 35.2cm, 간송미술관

조선시대 관료사회에서는 뇌물의 하한선으로 통용되는 '다섯들이'가 있었다. 사진 = 신윤복, 聽琴賞蓮, 28.3cm x 35.2cm, 간송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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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슬아치의 뇌물 마지노선

조선시대 관료사회에서는 이른바 ‘다섯들이’라 하는 뇌물의 하한선이 존재했다. 먼저 식음을 받지 않는 먹여들이, 향응을 받지 않는 마셔들이, 말 또는 가마를 받지 않는 태워들이, 여색을 받지 않는 안겨들이, 부정한 돈 ‘좌전’을 받지 않는 왼손들이까지. 이 다섯 항목은 뇌물에 있어 불문율처럼 통용되는 듯했으나 세상사 언제고 사람 뜻대로만 될 수는 없는 법. 다섯들이가 무색하게 조선 오백 년간 벌어진 뇌물사건은 그 수를 다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많고, 수뢰품목 또한 각양각색인 데다, 뇌물로 관직에 오른 벼슬에 대한 백성의 조롱 또한 신랄하게 쏟아졌다.

세종은 뇌물금지법을 도입하기 위해 21년을 관료들과 투쟁해야 했다. 왕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사진 = SBS 뿌리깊은 나무에서 한석규가 연기한 세종

세종은 뇌물금지법을 도입하기 위해 21년을 관료들과 투쟁해야 했다. 왕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사진 = SBS 뿌리깊은 나무에서 한석규가 연기한 세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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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의 뇌물 근절을 향한 집념

먼저 관료의 뇌물수수를 엄중히 꾸짖은 세종은 정도전 사후 사문화되어있던 뇌물금지법을 부활시켜 준 사람과 받은 사람 양자를 모두 처벌할 것을 천명했지만, 여기엔 큰 구멍이 있었다. 1424년 7월 세종이 뇌물금지법 제정을 놓고 신하들에게 법안 작성권을 넘기는데, 당시 영의정이었던 유정현은 “나 같은 늙은이가 향포나 음식을 받는 것이 무슨 해가 되겠는가”라며 넌지시 예외조항의 필요성을 언급했고, 이에 신하들이 먹는 물건을 주고받는 것에 대한 예외조항을 만들어 자신들의 편의를 보장한 것.

세종은 2년 뒤인 1426년 대신들에게 예외조항 없는 뇌물금지법 시행을 명했지만, 당사자인 그들이 적극적으로 법제정에 나설 리 없었다. 결국 이대로 유야무야 되는가 싶던 뇌물금지법은 21년 뒤인 1447년 제주목사 이흥문이 고위관료들에게 주기적으로 제주 특산물인 육포, 생선포, 말장식 등을 제공한 사건을 통해 수면 위로 떠올랐고, 그 물건의 값어치를 떠나 머나먼 제주도에서 도성까지 물건을 운송하는 것, 또한 상납의 고정성 때문에 겪어야 했을 제주 백성의 고통을 헤아려 세종은 일체의 선물이나 증여를 금지하고 주고받은 자 모두를 처벌하는 뇌물금지법을 반포했다. 왕이지만 법 제정부터 시행령 반포까지 꼬박 21년이 걸린 것이다.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실록을 기록하는 사관이 이 사건을 기록하며 말미에 “음식물까지 모두 뇌물로 논하는 것은 가혹하게 따지는 폐단이다”며 볼멘소리를 하는데, 당시 서슬 퍼런 세종의 뇌물근절의지를 역으로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더덕 꿀떡을 맛있게 만들어 정승 지위에 오르고, 잡채를 기가막히게 요리해 판서 책봉을 받은 이들이 등장한 광해군 치세 연간은 음식 뇌물과 이를 사랑한 임금을 향한 백성들의 불만과 조롱이 고조된 때였다. 사진 = 조선왕조실록 광해군일기

더덕 꿀떡을 맛있게 만들어 정승 지위에 오르고, 잡채를 기가막히게 요리해 판서 책봉을 받은 이들이 등장한 광해군 치세 연간은 음식 뇌물과 이를 사랑한 임금을 향한 백성들의 불만과 조롱이 고조된 때였다. 사진 = 조선왕조실록 광해군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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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덕정승 잡채판서의 등장

씹는 맛과 향기가 뛰어난 더덕은 중국에선 주로 약재로 활용했지만 우리나라에선 예부터 구이, 무침 등으로 자주 먹는 식재료였다. 광해군 때 관리인 한효순은 집에서 만든 더덕 꿀떡을 왕께 진상했는데 그 맛이 어찌나 인상 깊었던지 광해군은 그를 총애하며 가까이 두었고, 벼슬이 좌의정에 이르자 백성들은 그를 두고 ‘沙參閣老(사삼각로: 더덕정승)’이라 조롱했다.

광해군의 음식 사랑(?)은 더덕에서 그치지 않고 얼마 뒤엔 ‘잡채’에 꽂히게 됐는데, 관리 이충이 집에서 잡채를 비롯한 진기한 음식을 왕께 진상하자 나중엔 그가 집에서 음식 만들어 오기를 기다렸다 왕이 식사를 할 정도였다, 이내 이충이 호조판서 자리에 오르자 백성들은 더덕정승에 이어 ‘雜菜尙書(잡채상서)’라고 비꼬았다. 빼어난 음식 솜씨에 마음을 뺏긴 광해군이 고른 이 인물들은 훗날 백성을 수탈하는 데 앞장서 그의 치세에 큰 누를 끼쳤으니, 씁쓸한 음식 뇌물이 불러온 참사가 아닐 수 없었다.

지난 2월 21일 영장실질심사를 받기 위해 서울중앙지법에 출석한 우병우 전 청와대 민정수석. 사진 = 아시아경제DB

지난 2월 21일 영장실질심사를 받기 위해 서울중앙지법에 출석한 우병우 전 청와대 민정수석. 사진 = 아시아경제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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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물을 끊어내는데 수사기관의 강력한 의지는 필수 불가결한 요소였고, 이에 따라 조선시대 사헌부 관리들은 엄격한 규율을 지켜냈는데, 성종 16년 사헌부 서리 김경손과 나장 조승로는 저자에서 사람들과 술을 마셨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온 가족이 평안도 이주처벌을 받았을 만큼 사정기관의 부정에 대한 기준은 가혹했다.

전직 대통령의 소환 조사를 마친 검찰이 구속기소를 놓고 고심하고 있는 가운데, 수사의 칼날이 대기업을 거쳐 박근혜 정권 심장에서 국내 사정기관을 사실상 총괄한 우병우 전 민정수석을 향하고 있다는 관측이 나오고 있는 오늘. 우리는 현대판 더덕정승과 잡채판서의 징벌을 목도할 수 있을까. 한 그릇의 잡채, 한 잔의 술에 일희일비했던 역사의 그림자는 지금 여기에도 넓게 드리워져 있다.




디지털뉴스본부 김희윤 기자 film4h@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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