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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승들의 사생활-14장 흐르는 강물처럼(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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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승들의 사생활-14장 흐르는 강물처럼(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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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네.” 훌훌 넘기며 대충대충 대본을 살펴본 배문자가 만족한 듯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선인세 날릴 셈 하구서 시킨 일인데, 역시 하림이야.”
“지금 날 놀리는 거지?”

“아니야. 진짜야.” 그녀가 정색을 하며 말했다.

“그럼 다행이군.” 하림이 조금 안심한 표정으로 말했다.
“모헨조다로의 눈 먼 여가수.... 뭔가 나올 것 같은데....? 약간 슬프고, 로망이 있어 보이니까. 배경도 제법 거창하구. 베르사이유의 장미처럼 말이야.”

“잘 팔리면 또 말해. 다른 이야기도 많으니까.”

“알았쩌.” 하림의 농 같은 말에 배문자가 훗, 하고 웃으며 말했다.

“그나저나 갔던 시골은 어땠어? 애인 하나 만들었어?”

“애인....?” 하림은 입술을 쑥 내밀며 같잖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속으로 약간 움칠하는 기분이 들었다. 여자란 원래 넘겨짚기에, 냄새 맡는 데는 도사였기 때문이다.

“농담 마. 애인 구하려고 시골에 가는 미친 놈 봤어?”

“왜? 재주만 좋으면 절간에 가서도 새우젓 먹고 온다는 말도 있잖아.” 여전히 히히거리며 농담 투였다.

“미안하지만 난 그런 재주 없네. 너도 알잖아.” 하림은 끝까지 시침을 뚝 떼고 엄숙한 표정으로 말했다. 자기도 모르게 자기 입에서 소연이 이야기가 나올까봐 지레 다짐이라도 해두는 양 했다.

“일은 잘 됐어?”

“시골이라 해도 서울이랑 가까운 데라 그런지 인심이 옛날 같지 않더라. 사람들이 변했어. 이젠 서울이랑 다를 바가 하나도 없더라. 텔레비를 많이 봐서 그런가 다들 똑똑하구.”

“하긴.....” 배문자가 동의한다는 듯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하지만 두고 온 얼굴들이 떠오르자 자기도 모르게 조금 우울한 표정이 되었다. 이층집 영감은 나왔을까. 이장과 남경희는 어떻게 되었을까. 괜한 걱정에 마음 한 자락이 무거워졌다. 떠나고 나면 그 뿐이라 했지만, 또 그런 줄 알았지만, 그게 아니었다.

“차 한잔 할래?”

“응.”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 배문자는 일어나서 꽃무늬가 있는 컵을 꺼내었다. 지난 겨울에 보았던 그대로였다. 곧 내린 커피를 담아서 왔다. 뜨거운 김에서 진한 향기가 났다.

“쌩큐.” 후후, 커피를 불며 홀짝거리며 마시자니 하림은 어쩐지 행복한 느낌이 들었다. 문득 그 옛날 지하 작은 방에서 그녀와 함께 했던 추억이 떠올랐다. 이제 다시는 영영 오지 않을 추억이었고, 다시는 떠올리지 말아야할 추억이었다. 그녀의 곁에는 자기 대신 후후거리며 커피를 마셔줄 꽁지머리 만화가가 있었다. 생각하면 참 신기한 일이었다.

글. 김영현 / 그림. 박건웅



김영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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