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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임라이트]"세상의 아버지들을 사랑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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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변산'서 학수 아버지 연기한 배우 장항선

영화 '변산' 스틸 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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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이종길 기자]영화 '변산'에서 학수(박정민)는 아버지(장항선)를 증오한다. 어린 시절 자신과 어머니를 외면한 비정한 혈육이다. 아버지는 불치의 병에 걸려 시한부 인생이 되자 뒤늦게 용서를 구한다. 외면하는 학수에게 모욕을 당해도 다시 손을 내민다. 말주변이 없어 얼굴까지 들이민다. "자, 때려봐라." 쉽사리 해소되지 않는 부자간 갈등. 아버지는 눈을 감는 순간까지도 아들에게 미안해한다. "잘 살아라. 그것이 최고의 복수다." 이 말은 자식에게 해를 끼친 데 대한 미안함과 자신보다 잘 살길 바라는 아버지의 마음을 모두 담고 있다. 386 혹은 그 이전 세대가 후대에게 건네는 용기 있는 사과다. 아버지를 연기한 배우 장항선은 "어떤 아버지라도 그렇게 말할 것"이라고 했다. "아들에게 많은 잘못을 저질렀으니 진심으로 용서를 구하고 싶었겠죠. 어쩌면 아들의 따뜻한 눈빛을 더 그리워했을지 몰라요. 요즘 아버지들은 자식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지 못하니까요."
-요즘 아버지들이 외롭다고 생각하시나요.
"행복해 보이지는 않죠. 여기 오면서 파고다공원을 지나는데, 온갖 군상이 바둑, 장기를 두며 옹기종기 모여 있더라고요. 그 모습을 보며 매니저에게 말했죠. '나도 얼마 있다가 저 무리에 있을 것 같아. 다들 왜 이렇게 늙고 힘이 없어 보이니.' 세상이 변했어요. 아버지를 사랑하는 자식들이 생각처럼 많지 않아요. 텔레비전에서 병든 아버지 때문에 귀향해 농사를 짓는 아들의 모습을 보면서 많이 부러웠어요. 나도 그렇게 키웠어야 했는데."

-충분히 잘 키우셨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죽으면 뜨겁게 눈물을 흘려줄지 모르겠어요. 세상을 살아보니 어머니의 죽음에 슬픔을 토해내는 자식들은 많더라고요. 아주 애처롭게요. 아버지도 어머니 못잖게 가족을 위해 헌신해요. 그런데 자식들은 그걸 몰라주죠. 모든 공이 어머니에게만 돌아가는 듯해요. 그런 생각이 들면 10원 한 장 아껴가며 살아온 보람이 사라져요. 삐치는 거지(웃음). 실제로는 다르게 생각하고 있을 수도 있겠죠. 그렇다면 티를 조그만 내줬으면 좋겠어요."

-아버지는 어떤 분이셨나요.
"기억이 없어요. 6·25 전쟁이 일어난 세 살 때 돌아가셨거든요. 서울에 있던 집이 폭격을 맞았어요. 그래서 얼굴조차 몰라요. 애비 없는 후레자식으로 어린 시절을 보냈어요. 그때는 학수 아버지 같은 사람들이 흔했어요. 많은 아저씨들이 첩을 두거나 외도를 했죠. 술과 노름에 빠지기도 했고. 세상이 많이 달라졌어요."
영화 '변산' 스틸 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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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수 아버지 배역이 낯설지 않았겠어요.
"그래서 잘 그릴 자신이 있었던 것 같아요. 학수 아버지의 행위를 이해해요. 아들을 때리는 장면까지요. 아들이 독기를 발하길 바랐을 거예요. 얻어맞고 사는 모습을 보기 싫었을 테니까. 그런 감정과 행위가 담겨서 이 영화가 좋았어요."

-학수 아버지처럼 수술을 받으셨다고 들었어요.
"2년 전 일이에요. 대장암 수술을 받았죠. 의사가 가족들을 불러놓고 잘못될 수도 있다고 하더라고요. 그게 얼마나 책임전가처럼 느껴지던지(웃음). 솔직히 죽는 거, 무섭지 않았어요. 의사가 최선을 다할 거라는 믿음이 있었죠. 그래서 (가족들에게) 신경 쓰지 말라고 했어요. 수술에 여덟 시간이 걸렸어요. 일반적인 경우보다 두 배가량 더 걸렸죠. 문제는 수술을 받은 뒤였어요. 화장실을 자주 가게 되더라고요. 하루에 많게는 열다섯 번 들락날락하니까 연기자로서 끝났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촬영 도중에 화장실을 자꾸 가면 촬영이 그만큼 중단되니까요."

-애가 타서 마음이 조마조마했을 것 같아요.
"(섭외) 전화까지 안 오더라고요. 초조한 마음에 병적으로 핸드폰만 만지작거렸죠. 잘 때도 바로 옆에 뒀고. 영화이나 방송 관계자들에게 수술 사실을 알리지 않았어요. '장항선은 끝났다'라는 말이 돌까봐 일부러 쉬쉬했죠. 그런 상황에서 연락이 오지 않으니까 슬프더라고요. '쓸모없는 늙은이로 전락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죠."

-이준익 감독의 출연 제의가 무척 반가웠겠어요.
"'선생님께서 해주실 배역이 있습니다'라는 말에 아픈 몸이 완쾌되더라고요(웃음). 온몸에서 엔도르핀이 돌면서 희망이 보이기 시작했죠. 아마 그런 기분은 다시 느끼지 못할 거예요. 최선을 다 했는데, 관객이 어떻게 볼지 모르겠어요. 마음가짐은 95점이었는데, 결과물은 60~70점인 듯해요. 마음만큼 잘 안되더라고요."

-이준익 감독과 '왕의 남자' 뒤 두 번째 호흡이었어요.
"왕의 남자는 제게 큰 기쁨을 준 작품이에요. 사실 신경을 많이 쓰지 못해 미안한 마음이 있어요. 당시 세 작품을 한꺼번에 찍었거든요. 영화 '사랑을 놓치다'와 '강력 3반'이요. 쉴 새 없이 전국을 돌아다니며 연기했죠. 이준익 감독이 배려 차원에서 몇몇 컷을 생략해줬어요. 그때는 고마웠는데, 극장에서 개봉한 뒤에 후회했어요. '이렇게 흥행하는 작품에 얼굴이 한 번이라도 더 나와야 배우로서 존재감을 보여줄 수 있는데'라는 아쉬움이었죠. 그 뒤로 당시 일을 교훈으로 삼아 촬영 일정을 무리하게 잡지 않았어요."

영화 '변산' 스틸 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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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승장구하시다가 2010년에 당뇨병을 앓으셨어요.
"아직도 뚜렷하게 기억해요. 충남 공주에서 가족들과 식사를 하는데, 자꾸 목이 타더라고요. 아들한테 콜라 좀 사오라고 했죠. 그런데 30분 뒤에 또 먹고 싶어지는 거예요. 그렇게 콜라 다섯 병을 마시니까, 병원에서 검사를 받는 게 어떻겠냐고 하더라고요. 당 수치가 500㎎/㎗로 나왔어요. 입원하라고 하더라고요. 완강하게 거부했죠. 약을 먹으며 버티겠다고 했어요. 그런데 입원을 안 하면 약을 안 준다는 거예요. 그래서 억지로 끌려갔어요."

-왜 입원을 거부하셨나요.
"세상에서 병원이랑 파출소가 제일 싫어요(웃음). 당뇨병을 앓으면서 체중이 많이 줄었는데, 남들은 다이어트를 한 줄 알더라고요. 더 멋있어졌다며 엄지를 치켜세워줬죠. 같이 웃어줬어요. 그렇게 지내면서 '사는 게 별거 없구나'라는 생각을 많이 한 것 같아요."

-1970년대에는 건강한 배역을 두루 섭렵하셨는데.
"그때는 날아다녔죠(웃음). 찢어진 눈에 광대까지 나온 얼굴이라서 그런 연기라도 잘 해야 했어요. '실화극장'을 통해 액션배우로 자리를 잡을 수 있어요. 인천 차이나타운에 있는 건물 2층에서 안전장비도 없이 뛰어내렸죠. 밑에 라면박스나 포대도 깔아주지 않았는데, 이걸 해내지 못하면 연기를 할 수 없겠다는 각오로 발을 뗐어요. 그렇게 시멘트 바닥으로 몇 번을 떨어지니까 많은 방송 관계자들이 소문을 듣고 불러주셨어요.

-1975년 KBS에서 방영한 드라마 '전우'로 유명해지셨죠.
"카투사에서 운전병으로 복무한 덕을 봤죠. 당시 출연 배우 가운데 자동차를 운전할 줄 아는 사람이 없었거든요. 그래서 비중 있는 배역을 따낼 수 있었어요. 그 뒤에도 많은 전쟁드라마에 출연할 수 있었고요. 위험한 순간의 연속이었어요. 실제 TNT 폭탄이 터지는 상황에서 M1 소총을 들고 뛰어다닐 정도였죠. 정해진 동선에서 조금만 이탈해도 목숨을 잃을 수 있는 위험한 촬영이었어요. 무사히 마치고 많은 분들에게 박수를 받아 기뻤지만, 한편으로는 주연 배우들에게만 스포트라이트가 쏠려서 서운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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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영화와 드라마에 아버지로도 출연하셨는데.
"아마 아버지로 처음 출연한 작품이 드라마 '마지막 승부'일 거예요. MBC에서 장동건의 아버지 역할을 맡아달라고 해서 깜짝 놀랐죠. 걔는 정말 잘 생겼잖아요(웃음). 1970년대에 처음 방송국에 갔을 때도 잘 생긴 배우들이 많았어요. '이 곳에서 내가 연기자로 살아남을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죠. 그만두고 택시운전을 할까 고민하기도 했어요. 그런데 어떻게든 해보자고 마음먹고 버티니까 이렇게 살아남았어요. 이제 마지막 불꽃을 준비하고 있지만요."

-외로운 아버지가 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저도 그랬으면 좋겠어요. 많은 걸 바라지 않아요. 살면서 두 아들과 목욕탕을 함께 간 적이 한 번도 없어요. 등에 있는 때를 시원하게 밀어주기만 해도 만족할 것 같아요. 그 바람을 말로는 표현하지 못하겠어요. 옛날 아버지라서 그런가 봐요. 세상에 저 같은 아버지들이 많아요. 바둑에 훈수를 두는 모습이 꼿꼿하게 보이겠지만, 모두 자식들의 사랑을 그리워하고 있어요. 자식들을 사랑하기도 하고요. 그들의 말에 조금만 귀를 기울여줬으면 좋겠어요."






이종길 기자 leemean@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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