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Dim영역

[이종길의 영화읽기]'쓰나미 피아노' 슬픔·평화를 껴안다

스크랩 글자크기

글자크기 설정

닫기
인쇄 RSS

영화 '류이치 사카모토: 코다'

[이종길의 영화읽기]'쓰나미 피아노' 슬픔·평화를 껴안다
AD
원본보기 아이콘

동일본 대지진 현장 부서진 피아노와 첫 만남…대피소였던 중학교에서 피해자들 위한 연주
"좋아하는 음악가 바흐, 처연하지만 밝고 경건" 옅은 안개가 낀 음색으로 바꿔보는 작업부터
시간이 조율한 피아노, 자연으로 새로운 접근…매미소리·빗소리·시낭송 소리 등 함께 담아

거대한 물결에 휩싸인 피아노. 물위로 떠오르더니, 어딘가로 둥둥 떠내려간다. 예민한 악기다. 더 이상 좋은 소리를 기대하기 어렵다. 물속에 잠긴 순간 수명을 다한 것. 하지만 어디까지나 인간의 잣대로 내린 결론이다. 피아노의 뼈대인 목판은 나무다. 오랫동안 비를 맞으며 커왔다. 나무는 물 없이 살 수 없다. 피아노도 될 수 없었다. 피아노는 차오르는 물에서 감격적인 해후를 느꼈을지 모른다. 류이치 사카모토(66)는 그 마음을 헤아린 듯하다. 쓰나미에도 살아남은 피아노 이야기를 접하고 일본 북동부 미야기현 농업고교를 찾는다. "어떤 소리를 낼지 궁금했다."
검은 피아노는 수중고혼이나 다름없다. 현 일부가 끊어지거나 휘어졌다. 몇몇 건반은 안으로 움푹 들어가 올라올 줄 모른다. 류이치는 부드러운 손길로 피아노를 위로한다. 고요하고 평화로운 소리가 흘러나온다. 아름답지만 깊은 슬픔이 배어있다. "익사한 피아노 송장을 연주하는 기분이었다." 그는 '쓰나미 피아노'라고 이름을 짓는다. 그리고 피아노의 고향일지 모르는 후쿠시마현으로 향한다. 방사선량률이 206nSv/h까지 오르는 원전사고 제한구역. 마을 입구에는 커다란 간판이 세워져있다. '원자력 밝은 미래의 에너지.' 그러나 건물 곳곳이 무너진 폐허다. 아무도 살 수 없다. 물에 휩쓸려 떠내려 온 피아노처럼 모두 떠났다. 그는 그들을 위로하고 싶었지만 기다렸다. 음악가로서 당장 해줄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음악보다 먹고 사는 것이 더 중요하므로.

[이종길의 영화읽기]'쓰나미 피아노' 슬픔·평화를 껴안다 원본보기 아이콘


류이치는 지난 25일 CGV용산아이파크몰에서 열린 '스크린문학전' 마스터클래스에서 안타까운 기억을 떠올렸다. "많은 희생이 있었다. 지금도 상처가 아물지 않았고. 그런 피해자들에게 내가 가진 선의를 무리하게 강요해서는 안 된다. 상처를 입은 마음을 음악으로 읽어내는 것은 아주 민감한 일이다. 그들에게 여유가 생길 때까지 기다렸다." 영화 '류이치 사카모토: 코다'에서 그는 재해 당시 대피소였던 리쿠젠타카타 중학교에서 피해자들을 만난다. 직접 작곡한 '메리크리스마스 미스터 로렌스(Merry Christmas Mr Lawrence)'를 연주한다. 바이올린과 첼로가 더해진 선율은 오시마 나기사 감독의 영화 '전장의 크리스마스(1983년)'에 삽입된 음악이다.
류이치는 이 영화에 일본군 요노이 대위로 출연한다. 1942년 인도네시아 자바를 점령한 일본. 요노이 대위는 포로수용소로 끌려온 잭 셀리어스 소령(데이빗 보위)에게서 순수와 자유를 감지한다. 사랑하는 감정까지 피어나 상부의 명령조차 거부하며 그를 보호한다. 종전과 함께 이들의 처지는 뒤바뀐다. 승전한 연합군은 일본군을 모조리 처형한다. 전쟁이 빚어낸 비극. 파괴의 역사는 지금도 계속된다. 음악이 해줄 수 있는 건 위로뿐이다. 그래서 류이치는 사람들 속으로 들어간다. 도쿄 수상관저 앞에서 원자력발전소 반대를 외치는 등 유명세를 통해 시민의 관심과 참여를 촉구한다. 예술이 선동의 수단이 되는 것을 지극히 경계하면서도 사회의 모순을 외면하지 않는다. 그의 삶과 음악은 그렇게 현재에 머무르면서도 보다 먼 곳을 향하고 있다.

[이종길의 영화읽기]'쓰나미 피아노' 슬픔·평화를 껴안다 원본보기 아이콘


류이치는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나 클로드 아실 드뷔시, 루트비히 판 베토벤, 비틀스의 곡을 즐겨듣는다. 가장 좋아하는 음악가는 바흐다. "곡들에 상당한 깊이가 있다. 나이를 먹어도 이해할 수 없는 절대적 경지에 도달했다. 달이 좋아서 그쪽으로 달려가도 그 간격은 결코 좁혀지지 않는다. 내게는 바흐가 달과 같은 존재다." 바흐의 음악은 처연하면서 밝다. 경건한 선율에서 묘한 긴장이 흘러나온다. 그래서 많은 영화감독들이 차용했다.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 감독의 '대부(1972년)' 속 '파시칼리아와 푸가 C단조', 찰리 밴 담므 감독의 '바이올린 플레이어(1994년)' 속 '파르티타 제2번 D단조 샤콘느', 로만 폴란스키 감독의 '피아니스트(2002년)' 속 '무반주 첼로 모음곡 1번 프렐류드', 데이비드 핀처 감독의 '세븐(1995년)' 속 'G선상의 아리아.' "슬프고 우울한 감정이 꼭 들어 있다. 그가 살았던 시대를 상상하게 한다. 당시 민중의 삶은 굉장히 힘들었을 것이다. 전염병과 굶주림, 억압. 봉건사회라서 계급 차가 뚜렷했으니 지금보다 더 했을 것이다. 바흐는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다. 민중의 비극적인 삶을 바라보며 이런 질문을 던졌을 것 같다. '신은 존재하는가, 있다면 왜 이런 비극을 방관하는가?'"

류이치는 코랄 전주곡 F단조 '당신을 부르나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여'를 가리킨다. 이 곡은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감독의 영화 '솔라리스(1972년)'에 삽입됐다. 사물과 자연의 소리와 어우러져 순수한 욕망에 의해 합리적 이성이 제거되는 순간을 포착한다. 후두암 투병으로 지쳐 있던 류이치는 타르코프스키 감독의 자유로운 표현을 통해 심신을 달랠 수 있었다. 자연과 사물의 소리에도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바흐의 코랄을 옅은 안개가 낀 음색으로 바꿔보는 작업부터 시작했다. 마치 규칙이 없는 듯한 안개의 움직임 속에서 엄격한 논리가 모습을 드러내듯. 사물의 소리(모노)와 환경음도 수집했다. 이를 하나의 템포에 모두가 맞추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소리가 고유의 템포를 가진 음악을 만들었다.

[이종길의 영화읽기]'쓰나미 피아노' 슬픔·평화를 껴안다 원본보기 아이콘


"1970년 오사카 엑스포 때 바셰 형제가 음향 조각 작품을 출품했던 것을 기억하고 그 소재와 녹음의 가능성을 타진해 보았다. 한여름 교토로 넘어가 에어컨이 멈춘, 매미 소리가 울리는 대학 캠퍼스에서 몇 시간 동안 녹음했다. '가상의 타르코프스키 영화 사운드트랙'이라는 콘셉트의 앨범도 혼자 만들어보기로 결심했다. 그가 남긴 영화 일곱 편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장면을 떠올리며 숲 속을 걷는 나의 발자국 소리, 6월 뒤뜰의 빗소리, 샤미센(일본 현악기)을 스치는 소리, 보컬 데이비드 실비안이 타르코프스키 감독의 아버지 아르세니 타르코프스키의 시를 낭송하는 소리 등을 배치해나갔다."

자연과 가까워지려는 노력은 쓰나미 피아노에서도 보인다. 몇 개의 소리를 잃어버린 악기. 그 소리는 인간에게 다소 이질적이다. 하지만 자연에게는 익숙하다. 쓰나미를 겪으면서 자연스럽게 조율된 상태다. "일반적인 피아노 소리야말로 인간이 억지로 조율한 부자연스러운 상태다. 인간에게는 그게 자연스러울 것이다. 어떤 관객은 소리에 감탄하며 '미쳤다'고 할 것이다. 하지만 소리는 미치지 않는다. 자연 상태로 되돌아가기 위해 발버둥을 칠 뿐이다. 언제부턴가 억지스러움에 대한 혐오감이 내 안에 존재하는 듯하다." 그는 새로운 접근을 정답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음악에는 정답은 없기에 아직 가보지 못한 산에 지도 없이 오를 뿐이다. "하나의 산을 넘으면 또 다음 산이 보인다. 그것이 언제까지 이어질지, 아직은 잘 모르겠다."




이종길 기자 leemean@asiae.co.kr
AD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함께 본 뉴스

새로보기

이슈 PICK

  • 6년 만에 솔로 데뷔…(여자)아이들 우기, 앨범 선주문 50만장 "편파방송으로 명예훼손" 어트랙트, SBS '그알' 제작진 고소 강릉 해안도로에 정체모를 빨간색 외제차…"여기서 사진 찍으라고?"

    #국내이슈

  • 美대학 ‘친팔 시위’ 격화…네타냐후 “반유대주의 폭동” "죽음이 아니라 자유 위한 것"…전신마비 변호사 페루서 첫 안락사 "푸바오 잘 지내요" 영상 또 공개…공식 데뷔 빨라지나

    #해외이슈

  • [포토] 정교한 3D 프린팅의 세계 [포토] '그날의 기억' [이미지 다이어리] 그곳에 목련이 필 줄 알았다.

    #포토PICK

  • 제네시스, 中서 '고성능 G80 EV 콘셉트카' 세계 최초 공개 "쓰임새는 고객이 정한다" 현대차가 제시하는 미래 상용차 미리보니 매끈한 뒤태로 600㎞ 달린다…쿠페형 폴스타4 6월 출시

    #CAR라이프

  • [뉴스속 인물]하이브에 반기 든 '뉴진스의 엄마' 민희진 [뉴스속 용어]뉴스페이스 신호탄, '초소형 군집위성' [뉴스속 용어]日 정치인 '야스쿠니신사' 집단 참배…한·중 항의

    #뉴스속OO

간격처리를 위한 class

많이 본 뉴스 !가장 많이 읽힌 뉴스를 제공합니다. 집계 기준에 따라 최대 3일 전 기사까지 제공될 수 있습니다.

top버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