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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火요일에 읽는 전쟁사]'4대보험' 제도의 아버지가 철혈재상 '비스마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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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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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이현우 기자] 매년 노동절, 즉 메이데이(May Day)와 관련된 역사적 인물들이라고 하면 대부분 19~20세기의 사회주의 운동가나 구 공산권 인물들이 언급되곤 한다. 그런데 이 노동투쟁의 성과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는 사회보험의 역사를 살펴보다보면 정말 어울리지 않는 한 인물과 만나게 된다. 그 주인공은 모든 일은 피와 철로 해결된다 외쳤던 철혈재상, '오토 폰 비스마르크(Otto von Bismarck)'다.
믿기 힘든 사실이지만, 비스마르크는 현대의 4대 사회보험 제도 중 3개를 세계 최초로 입안해 만든 정치인이다. 그래서 사회보장제도와 관련한 역사를 다룬 모든 서적에 반드시 이름이 나온다. 그의 집권시기 만들어진 이른바 '비스마르크 사회보험'이라 불리는 보험들은 의료보험(1883), 산재보험(1884), 연금보험(1889)이 있다. 전 세계 사회보장제도의 기틀을 마련한 인물인 셈이다. 세계사에서는 아돌프 히틀러가 세계 최초의 동물보호법 입안자인 사실과 함께 가장 아이러니한 일로 손꼽힌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비스마르크의 이미지란 당시 프로이센 제국의 철모로 정수리에 뾰족한 창이 달린 '피켈하우베(Pickelhaube)'를 눌러쓴 강직한 군인 이미지다. 독일 통일의 주역이자 강력한 군국주의 정책을 밀어붙여 1866년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뒤이어 1871년 보불전쟁도 승리로 이끌어 독일제국의 건국과 독일 통일을 이룩한 민족영웅처럼 묘사돼있다.

1871년 보불전쟁 승전이후 베르사이유 궁에서 열린 독일제국 선포식 모습(사진=위키피디아)

1871년 보불전쟁 승전이후 베르사이유 궁에서 열린 독일제국 선포식 모습(사진=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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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그의 재임 초반은 실제로 전쟁의 연속이었다. 덴마크와 슐레스비히-홀스타인을 놓고 전쟁을 벌였고, 오스트리아, 프랑스와도 전쟁을 벌였으며 이를 통해 두 유럽의 강대국이 약화되면서 자연스럽게 프랑스와 오스트리아의 압박에 시달리던 이탈리아도 통일을 이룩하게 된다. 대체로 보불전쟁이 마무리된 1871년 이전에 형성된 이미지 때문에 그는 군국주의의 화신처럼 그려졌고, 독일에서도 철혈재상의 이미지가 강조되면서 2차대전 당시에는 그의 이름을 딴 '비스마르크 전함'이 취역하는 등 온통 군사적 부문만 강조됐다.

하지만 실제 비스마르크란 인물은 군인 출신도 아니고 원래 외교관 출신이었다. 자유주의 분위기의 부르주아지 가문이었던 외가의 영향과 어머니 영향을 많이 받고 자란 그는 법대를 다녔지만 젊은 시절은 방탕하게 보냈고, 가문의 뒷받침과 사교적인 성격 덕에 쌓은 인맥 덕분에 재상이 되기 전까지 외교관으로 크게 활약했다. 군대는 당시 귀족자제들과 달리 매우 싫어한데다 몇번을 군대를 안가려고 병역면제 신청도 냈다가 거절됐고, 의무복무도 제대로 채우지 않고 제대했다.

이랬던 인물이 1848년 유럽 전역에서 발생한 2월혁명의 와중에서 강경진압책을 주장하고 재상이 되자 독일제국의 통일을 위해 군비확대와 징병제 연장 등을 주장하게 된 것이다. 의무복무도 제대로 안한 철혈재상은 전시에 독일제국 육군 원수가 되기도 했다. 그러다가 또 보불전쟁이 끝나고 제국이 성립되자 세상 다시없는 평화주의자로 돌아서며 내치에 힘을 쓴다. 그가 4대보험의 아버지가 된 것은 바로 이 시기였다.

재임 초기 사회주의 정당 허용, 어린이 노동 금지, 청소년과 여성 노동시간 규제 등 노동권익 증진 정책으로 '노동황제'라 불렸던 빌헬름2세 모습. 노조 탄압을 주장하던 비스마르크와 정책상 자주 충돌했다.(사진=위키피디아)

재임 초기 사회주의 정당 허용, 어린이 노동 금지, 청소년과 여성 노동시간 규제 등 노동권익 증진 정책으로 '노동황제'라 불렸던 빌헬름2세 모습. 노조 탄압을 주장하던 비스마르크와 정책상 자주 충돌했다.(사진=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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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그가 순수한 의도에서 4대보험 제도를 만들었다고는 아무도 믿지 않는다. 당시 과격한 방향으로 나가던 독일의 노동자 시위에 대해 군 병력을 투입해 강경진압할 것을 주장하던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그의 사회보장제도 입안은 더 이상의 봉기를 막고 최소한의 살 길을 열어줘서 노동시위의 과격화를 막는 선제적 조치 수준으로 평가된다. 그의 명언 중 하나도 노동과 관련한 그의 생각을 잘 대변해준다. "내가 청년들에게 할 말은 오직 하나다. 일해라, 또 일해라, 죽을 때까지 일해라"

그의 의도가 결코 노동인권 증진에 있지 않았다는 사실은 사회보험 입법과 함께 사회주의 진압법을 함께 시행한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이보다 앞서 반사회주의법을 통과시켰고, 이어 문화투쟁이라 불리는 종교 억압책도 펼치면서 정적이 많이 생겼다. 이것이 훗날 그의 정치인생을 끝장내는 부메랑으로 돌아오기도 했다. 1888년 빌헬름1세가 죽고 뒤이어 프리드리히 3세도 즉위 3개월만에 세상을 떠나자 빌헬름2세가 즉위했고, 이 새 황제는 비스마르크와 사사건건 부딪히기 시작했다.

빌헬름 2세는 비스마르크와 정반대로 외치에서는 대외 확장정책, 내치에서는 적극적인 노동인권 증진책을 폈다. 그는 사회주의 정당 허용, 만 13세 이하 어린이의 노동금지, 청소년과 여성들의 노동시간 규제, 노동재판소 설치 등 사회안정을 위한 노동인권 정책을 많이 폈다. 그래서 그의 별명은 '노동황제'일 정도였다. 비스마르크는 외치나, 내치 모두 이런 새 황제의 정책에 반대하며 많은 부문에서 충돌했다.

결국 빌헬름2세는 정적인 비스마르크를 제거하기 위해 그의 연적들인 사회주의 정당, 카톨릭계 정당과 손을 잡고 그를 공격했고 1890년 총선에서 비스마르크의 정파인 국민자유당은 대패해 수상 자리에서 해임된다. 그리고 독일 국민들도 그의 퇴진을 열광적으로 반겼다고 한다. 그가 다시 독일제국의 영웅으로 추앙된 것은 빌헬름2세의 대외 확장정책으로 1차 세계대전이 터지고, 유럽 제일의 공업국가였던 독일이 전쟁으로 폐허가 된 이후였다.




이현우 기자 knos84@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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