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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길의 영화읽기]'아이, 토냐' 하딩을 위한 변명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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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길의 영화읽기]'아이, 토냐' 하딩을 위한 변명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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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아이, 토냐'는 독특한 문구로 시작한다. '직설적이고 반박의 여지가 가득한 토냐 하딩과 (그녀의 전 남편) 제프 길룰리의 실제 인터뷰를 바탕으로 함.' 인터뷰를 기다리는 하딩(마고 로비)이 모습이 이어진다. 담배에 불을 붙이고는 카메라를 쳐다본다. 자유분방해 보이지만 뭔가를 경계하는 낌새다. 발자취를 돌이켜 보면 이해할 수 있다.
그녀는 미국 여성으로는 처음으로 세계피겨선수권대회에서 트리플악셀(3회전 반 점프)에 성공했다. 1992년 알베르빌동계올림픽과 1994년 릴레함메르동계올림픽에 미국 대표로 참가했다. 그런데 두 번째 자격을 얻으면서 폭행사건에 휘말렸다. 라이벌인 낸시 캐리건이 훈련 도중 괴한에게 피습당해 무릎에 타박상을 입었다. 연방수사국의 조사에서 길룰리와 하딩의 경호원 션 에릭 에카르트가 사건에 개입한 정황이 드러났다. 하딩의 혐의는 발견되지 않았다. 그러나 에카르트가 체포되면서 테러의 배후로 지목됐고, 언론은 그녀의 결점을 파헤쳤다. 이혼소송, 권총 소지 등을 거론하며 헐뜯었다. 반면 캐리건에게는 미모와 재능을 겸비했다는 찬사를 보냈다. 하딩은 '세기의 악녀'가 될 수밖에 없었다.

크레이그 질레스피(51) 감독은 "대중매체는 늘 하딩을 악인으로 낙인찍어왔다. 그녀의 인생은 그런 말로 설명할 수 없을 만큼 복잡하고 비극적이다. 캐리건에게 일어났던 일은 끔찍하지만, 여기에 조금 더 복잡한 내막이 있다는 걸 알리고 싶었다"고 했다. 그는 하딩의 어머니 라보나 골든(앨리슨 제니)과 길룰리(세바스찬 스탠)를 통해 불우한 환경을 부각한다. 골든은 딸이 친구들과 노는 것을 막는가 하면 학부모들이 보는 앞에서 학대를 서슴지 않는다. 길룰리는 하딩과 뜨거운 사랑을 나누면서도 걸핏하면 성을 내고 폭력을 휘두른다. 이어지는 하딩의 인터뷰는 처참하다. "다신 안 그러겠다는 말은 안 믿었어요. 엄마도 날 때리지만, 날 사랑하거든요. 다 내 잘못이라고 생각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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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레스피 감독은 온갖 비난을 버텨내야 했던 삶에도 주목한다. 남모를 유약함은 릴레함메르 동계올림픽 무대에 오르기 직전의 모습에서 함축적으로 나타난다. 대기실에서 혼자 거울을 보며 화장하는데, 쏟아지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해 얼굴을 계속 매만진다. 하얀 이를 드러내며 피날레의 미소를 지어보지만 절박한 심정을 감추기에는 부족하다.

일각에서는 이런 전개에 불쾌함을 드러낸다. 캐리건의 반박을 싣지 않은 채 하딩의 변명만 늘어놓을 필요가 있느냐는 지적이다. 캐리건 피습 사건을 취재한 J.E. 베이더는 미국 영화매체 인디와이어와의 인터뷰에서 "하딩은 지난 24년간 계속 말을 바꿨지만, 자신이 피해자이고 주위 사람들이 끔찍하다는 요지는 그대로였다. 아이, 토냐는 상습적으로 진실에 문제를 제기해온 그녀의 꿈을 완벽하게 실현해준 영화"라고 비판했다. "처음 세운 계획에는 캐리건을 죽이거나 아킬레스건을 절단하는 것까지 있었다. 하딩은 이를 잘 알고 있었으며, 캐리건이 바로 불구가 되지 않을까봐 조바심을 냈다"고 했다. 질레스피 감독은 이런 우려를 인지했을 것이다. 라이벌 관계를 거의 조명하지 않고, 주위 사람들의 엇갈리는 인터뷰를 곳곳에 삽입한다. 진지해도 모자랄 장면을 가볍게 그리기도 한다. 편집에서 급박한 장면 전환을 더해 관객이 그녀의 삶에 빠져들 여지를 없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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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사건의 진실을 밝히는데 관심이 없었을지 모른다. 미국 보수주의 여성상과 거리가 멀 수밖에 없었던 하딩의 삶에 거의 모든 신을 할애하기 때문이다. 하딩이 집으로 돌아가는 심사위원을 붙잡고 점수에 의문을 표하는 장면의 대사는 적나라하기까지 하다. "심판들이 저를 싫어하는 건 알아요. 하지만 점프를 모두 성공했잖아요." "실력이 문제가 아니에요. 비공식적으로 말하지만 당신은 우리가 원하는 이미지가 아니에요." 전환점을 마련하지 못한 하딩은 가십의 대상에 불과했다. 영구제명으로 모든 것을 잃은 뒤에도 그랬다. 유명세를 팔아 생활비를 벌어야 했고, 그 모습에 대중은 열광했다. 그래서 트리플악셀에 성공하는 장면과 권투 경기에서 다운되는 장면이 교차로 펼쳐지는 마지막 신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두 모습에 환호하는 대중의 얼굴이 어퍼컷만큼 폭력적으로 그려진다. 하딩은 피가 섞인 침을 바닥에 뱉고 벌떡 일어난다. 누군가에게는 오기로 느껴지겠지만, 그녀에게는 생존을 위한 몸부림일 것이다. 지옥 같은 삶을 벗어날 방법이 달리 없을 테니 말이다.




이종길 기자 leemean@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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