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종 때 북벌을 목표로 대규모로 심기도
사실 벚꽃축제라고 하면 광복 직전만 해도 왜색이 짙은, 일제의 잔재라며 매우 금기시되는 분위기였다. 일제가 창경궁 일대와 남산 일대 대규모로 심었던 벚나무들은 해방 직후 대부분 베어버리거나 여의도 일대에 옮겨 심어지기도 했다. 러일전쟁 이후 일본 해군이 주둔하면서 심어진 진해의 벚나무들도 이때 베어졌다가 1960년대부터 다시 심어졌다.
영화 '라스트 사무라이'에서 무사도의 상징처럼 등장하는 벚꽃. 그러나 정작 사무라이들이 크게 활약했던 15~16세기에 벚꽃놀이는 과거 귀족들의 문약한 놀이로 멸시되곤 했다.(사진= 영화 '라스트 사무라이' 장면 캡쳐)
원본보기 아이콘그러나 일본에서 벚꽃이 국화 반열로 올라온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 일단 일본 왕실의 상징 꽃은 국화(菊花)고, 일본 내각의 상징문양은 오동나무로 벚꽃은 전통적인 상징물로 쓰이진 않았다. 벚꽃이 상징물로 많이 쓰인 곳은 근대 일본 군대나 경찰에서 계급장으로 쓰일 때부터다. 일본인들도 중국인들이나 한국인들처럼 대체로 봄꽃으로는 부유함의 상징으로 주로 쓰인 매화꽃을 가장 좋아했고, 정작 사무라이들이 가장 활발하게 활동하던 15~16세기에는 봄꽃놀이를 가는 것은 과거 문벌귀족들의 허례허식이자 잔재로 여겼다.
오히려 전 근대시대에는 우리나라에서 벚나무를 더 소중히 여겼으며, 심지어 일본 등에서 수입해다가 심기까지 했다. 벚나무가 조선이 자랑하는 '활'을 만드는데 있어 매우 중요한 군수물자였기 때문이다. 일단 원산지가 히말라야 일대로 알려진 벚나무는 일본 뿐만 아니라 중국, 한반도에도 많았으며, 고려시대 만들어진 세계기록유산인 '팔만대장경'의 경우에도 장판의 60% 이상이 산벚나무로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졌다. 벚나무는 가로로 잘 쪼개져 목판을 만드는데도 좋았으며, 껍질은 '화피'라 불리며 활을 만드는데 아주 중요한 군수물자였다.
세종실록지리지에도 화피가 군수물자로서 평안도 강계지역과 함길도 일대에서 공물로 바쳐졌다는 기록이 있으며, 조선왕조 실록 중종21년 3월 기사에는 당시 집의(執義)벼슬에 있던 한승정(韓承貞)이란 인물이 중종에게, "화피 같은 것은 또한 우리나라에서 금하는 물건인데 중국에 밀무역하여 우리나라에는 하나도 없게 되었습니다"라고 한 기록이 있다. 조선군의 핵심 무기라고 할 수 있는 활을 만드는 군수물자다보니 금수품목으로 지정돼있었음을 알 수 있다.
정묘·병자호란의 수난을 겪은 뒤, 북벌을 정치적 목표로 삼았던 임금인 효종 때는 북벌을 위해 벚나무를 대대적으로 심기도 했다. 서울 우이동에 수양벚나무를 심어 나무는 궁재로 삼고, 껍질은 화피를 만들고자 했다는 기록이 있다. 당시 심었던 나무들 중 일부가 지리산 밑 구례 화엄사 경내에 옮겨 심어져 살아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이후 영조, 정조 연간에는 일본 통신사들에게 벚나무 묘목 수백그루를 가져와 우이동 일대 심게 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물론 꽃구경의 대상으로 심어진 것은 아니었지만, 전 근대시대에는 일본보다 오히려 한국에서 전략물자로서 벚나무에 대한 관심이 훨씬 높았던 것.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이른바 사무라이 무사도에 대한 만들어진 이미지로 인해 일본에서도 벚꽃이 봄꽃의 대명사처럼 만들어졌으니, "남자 중의 남자는 사무라이, 꽃 중의 꽃은 벚꽃"이라는 일본인들의 벚꽃사랑은 굴곡진 근현대사가 만들어낸 전통 아닌 전통인 셈이다.
이현우 기자 knos84@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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