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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火요일에 읽는 전쟁사]일제는 왜 조선에 '활쏘기 금지령'을 내렸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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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영화 '최종병기 활' 장면 캡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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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이현우 기자] 일제강점기가 막 시작된 1910년, 총검을 찬 군경을 동원한 일제의 소위 '무단통치'가 시작되자 일제가 시급히 내린 칙령 중 하나가 바로 '활쏘기 금지령'이었다. 이는 치안 관련 칙령으로 내려진 조치로 민간에서 일체 활쏘기를 못하게 하는 명령이었다. 이후 구한말까지 서울에서도 아주 흔하게 볼 수 있었다는 '활터(射亭)'는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자취를 감추기 시작했고, 세계적으로 명성을 얻고 있는 한국 양궁에 비해 국궁은 오늘날에는 명맥만 남아있는 상황이다.
사실 1910년이면 이미 활은 제식무기에서 벗어난 시대고 조선에서도 1894년, 갑오개혁 이후에는 의병들도 대부분 개인화기인 총기로 무장한 상태였다. 활쏘기는 스포츠 정도로 생각할 수 있는 시대였지만, 그럼에도 일제가 그토록 활을 못 쏘게 하려고 했던 이유는 활을 잘 쏘면 그만큼 총도 잘 쐈기 때문이다. 조선인들은 정말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대부분 명궁이었고, 이런 사람들에게 활보다 훨씬 쏘기 쉬운 총기가 쥐어지면 그 살상효과는 배가 될 수밖에 없었다. 조선총독부 입장에서, 만약 조선에 대규모 소요사태가 발생해 총기가 민간으로 대량 유출될 경우, 곧바로 대규모 의병이 일어날 수도 있는 상황을 우려했을 것이다.

활쏘기 훈련을 받고 있는 사람들을 그린 단원 김홍도의 민속화 '활쏘기' 모습. 조선시대에는 남녀노소 모두 활쏘는 법을 배웠다고 전해진다.(사진=국립중앙박물관)

활쏘기 훈련을 받고 있는 사람들을 그린 단원 김홍도의 민속화 '활쏘기' 모습. 조선시대에는 남녀노소 모두 활쏘는 법을 배웠다고 전해진다.(사진=국립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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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한말까지 이어진 조선의 활 문화를 살펴보면, 일제의 우려가 단순한 기우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인들은 남녀노소 누구나 활을 잘 쐈으며, 13세 이상부터 활쏘기를 배웠다고 한다. 무과 시험 준비생들은 물론, 문과 공부하는 선비들도 활쏘기가 유학자의 덕목 중 하나인 육예(六藝)에 속한다며 열심히 수련했고, 노인들의 스포츠임은 물론 심지어 기생들까지 활을 쏴서 내기를 할 정도로 조선은 '활의 나라'였다.

한민족의 시조라 여겨지는 동이족(東夷)의 '夷'자 역시 활을 잘 쏘는 종족임을 나타내는 글씨로 알려져있고,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는 조정에서 적극적으로 활쏘기를 권장했다. 특히 북방 여진족과 남해안 일대 왜구문제로 인해 민간인들도 적극적으로 지역방어에 나서게 해야한다는 제안에 따라 세종대왕 시대에는 아예 변방 주민들은 모두 활을 익히게 했다. 세종실록에는 북쪽 변방의 13세 이상 주민들에게 모두 활을 익히게 하고, 고을마다 그냥 서서 쏘는 보사(步射)와 말을 타고 쏘는 기사(騎射), 말타고 창을 날리는 기창(騎槍) 등 3과목을 시험을 봐서 고을마다 30여명을 뽑아 등수별로 포상토록 지시한 기록도 있다.
고종이 경희궁 내에 세운 활터이자 직접 활쏘기도 했었다 알려진 '황학정(黃鶴亭)' 모습(사진=한국관광공사)

고종이 경희궁 내에 세운 활터이자 직접 활쏘기도 했었다 알려진 '황학정(黃鶴亭)' 모습(사진=한국관광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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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 세조실록에는 당시 문신인 양성지(梁誠之)가 고하기를, "조선의 인민은 100만호인데 그중 활을 쏘는 사람이 30만명이고 정병이 10만명이며, 용사가 3만명입니다"라고 고했다는 내용이 있다. 세조 역시 활쏘기를 장려해 궁사 100만명을 길러 오랑캐를 제압할 것이라 기약했다는 내용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미 이때부터 집집마다 유사시 궁병으로 쓸 수 있을 정도로 활을 잘 다루는 사람이 많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 전쟁을 거치면서 민간의 활쏘기는 계속 장려됐고, 무기가 화승총으로 바뀐 뒤에도 여전히 장전속도 면에서 화승총보다 우수한 활은 제식무기로 애용됐다. 활을 잘 쏘는 민족답게 총기 역시 잘 다뤘던만큼, 조선인들의 사격솜씨는 동아시아 일대에서 유명했으며, 병자호란 당시에도 많은 청나라 장수들이 저격받아 죽기도 했다. 청나라가 이후 나선정벌 때, 조선의 조총수들을 파견해줄 것을 요구한 것도 그만큼 조선군의 사격 능력이 우수했음을 알려주는 대목이다.

1899년 대한제국에 국빈방문했던 하인리히 왕자 모습. 그는 조선 전통 궁술시범을 보고 크게 감탄했고, 이에 자극받은 당시 고종황제의 명으로 궁술이 더욱 장려됐었다고 한다.(사진=위키피디아)

1899년 대한제국에 국빈방문했던 하인리히 왕자 모습. 그는 조선 전통 궁술시범을 보고 크게 감탄했고, 이에 자극받은 당시 고종황제의 명으로 궁술이 더욱 장려됐었다고 한다.(사진=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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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한말에는 국왕인 고종의 적극적인 장려하에 역시 군과 민간에서 모두 크게 유행했다. 이는 독일에서 온 왕자의 영향도 컸다. 1899년 6월, 당시 독일황제 빌헬름 2세의 친동생인 하인리히 왕자가 독일제국의 동아 함대 사령관 자격으로 대한제국을 공식방문했을 때, 고종에게 조선의 궁술이 몹시 인상적이며 가치있는 무술이라고 평가했던 것. 그는 조선의 전통 궁술을 보고 크게 감탄하면서 직접 활을 쏴보기도 했었다고 전해진다.

고종은 당시 군사강국으로 알려진 독일의 왕자가 조선의 전통 무예인 궁술을 칭찬한 일에 매우 감격했는지 왕자가 떠난 그 다음날 바로 궁술을 장려하라는 지시를 내린다. 그해 가을에 만들어 진 활터가 오늘날에도 남아있는 국궁장인 경희궁 북쪽에 위치한 황학정(黃鶴亭)이다. 이런 조선의 사정을 알고 있던 일제 입장에서는 조선의 활쏘기를 금지시켜야만 했던 셈이다.






이현우 기자 knos84@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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