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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임라이트]유리정원서 위로받고 세상 밖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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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과 닮은 캐릭터로 돌아온 배우 문근영

배우 문근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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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수원 감독 '유리정원'서 연인·친구에 배신 당한 재연役
숲속 '유리정원'서 은둔생활 모습...침체기 겪던 시절 떠올라 더 애틋
연기하면서 오랜만에 재미 느껴...위로 받고나니 '좋은 배우' 욕심

[아시아경제 이종길 기자]배우 문근영(30)은 최근 가평에 있는 애견펜션에서 휴가를 보냈다. 어머니, 여동생, 반려견과 함께 한 가족여행. 외진 숲속에 손님은 그들뿐이었다. 오랜만에 어린아이 같이 뛰어놀며 자유를 만끽했다. 먹장이 드리운 저녁, 그녀는 수영장 앞에 앉아 가족과 못다 한 이야기를 나눴다. 맥주 한 모금을 마시고 별도 올려다봤다. 왈카닥 눈물이 솟아올랐다. "갑자기 왜 울어?" "너무 행복해서 그래, 엄마." "뭐가 그렇게 행복한데?"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있잖아. 내가 좋아하는 것들도 가득하고. 밤, 별, 물, 강아지. 속이 꽉 차는 기분이야."

문근영을 지난 24일 서울 삼청동 카페 라디오엠에서 만났다. 하얀 스웨터를 입고 마중을 나온 그녀는 남을 배려하는 태도가 몸에 배어 있었다. 건조한 날씨를 걱정하며 레몬 향이 나는 물을 건넸고, 질문을 정확하게 이해하려고 의자를 앞으로 바싹 당겼다. 소박하고 꾸밈없는 미소로 어떤 질문에도 친절하게 답했다. 소문대로 수수하고 성정도 온순했다. 2005년 유명기획사가 영화계에 도는 지저분한 소문들을 취합해 PPT파일로 모아놓은 '연예인 X파일'이 유출됐을 때 문근영은 어떤 타격을 입지 않았다. 오히려 득을 봤다는 우스갯소리가 돌았다. 좋은 말만 잔뜩 쓰여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연예계에 기부문화를 정착시킨 일등공신이기도 하다. 고등학생 때부터 자신의 출연료를 선뜻 내놓으며 어려운 이웃을 도왔다. "할머니와 어머니의 교육 덕이에요. 신조가 '네 덕, 내 탓'이에요. 아무 것도 없이 태어났는데 무언가를 얻으려고 애쓰지 말라고 하셨죠. 그래서 노력한 만큼만 가져가요. 억울하면 불평하기보다 얼마나 힘든지를 증명하려고 하고요."
영화 '유리정원' 스틸 컷

영화 '유리정원' 스틸 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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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근영은 충무로를 이끌 차세대 유망주 1순위였다. 그러나 2006년 이철하 감독의 '사랑 따윈 필요 없어' 이후 약 10년간 영화에서 주연을 하지 못했다. 일부 우익인사들이 외조부의 좌익 경력을 끈질기게 물고 늘어진 탓도 있을 것이다. 피해당사자인 그녀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시간이 꽤 흐른 지금도 다르지 않다. "남을 미워하고 탓하는 게 싫어요. 배역을 따낼 때도 그래요. 경쟁을 기피하는 편이죠. 설사 누군가에게 지더라도 연연하지 않아요. 비겁해 보일 수도 있는데, 저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문근영에게도 욕심은 있다. 늘 더 좋은 연기를 꿈꾼다. 1999년 KBS 'TV는 사랑을 싣고'에서 야구선수 박재홍의 첫사랑을 연기하면서부터 생긴 목표다. "많은 고민과 시도를 했어요. 대사를 다르게 읊기도 하고, 표현 방식에 변화를 주기도 했어요. 그런데 쉽지 않더라고요. 노력한 만큼 돌아오지 않는 것 같아요. 그때마다 속으로 '아직 부족한가 보다', '조금 더 노력해야겠다'라고 많이 되뇌었어요. 그런데 언제부턴가 어떤 연기는 제 노력과 별개의 영역에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집착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마냥 자유롭지는 못했어요."

영화 '유리정원' 스틸 컷

영화 '유리정원' 스틸 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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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연기한 '유리정원' 속 재연도 결핍에 짓눌려 있다. 실험실에 파묻혀 엽록체를 이용한 인공혈액으로 인간의 생명을 연장하는 연구에 몰두하지만, 사랑했던 정교수(서태화)가 새 애인 수희(박지수)와 함께 그녀의 연구 성과를 빼앗는다. 사랑과 꿈을 모두 잃은 재연은 자신이 살던 숲으로 돌아간다. 세상과 고립된 채 혼자만의 연구를 계속한다. 문근영은 재연의 결핍을 다양한 얼굴로 나타낸다. 스스로를 유리정원에 가두면서도 내심 누군가에게 발견되기를 바라는 역설적인 마음이다. "처음에는 상처로 가득한 아픈 영화라고 생각했는데, 다시 보니까 저를 위로해주고 있더라고요. 말없이 토닥토닥 등을 두드려주는 친구 같이요."
문근영이 공감을 느낀 건 그녀가 재연과 많이 닮았기 때문이다. 특히 어려움이 닥칠 때마다 자신만의 유리정원으로 숨어든다. "스트레스를 받을 때마다 항상 그랬던 것 같아요. 집에서 조용히 가라앉혔죠. 그 때는 아무도 만나지 않아요." 문근영은 "사람들과 지내는 일이 가장 어렵다"고 했다.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의무나 책임으로는 다할 수 없는, 그런 섭섭한 감정이 있잖아요. 아무리 사회생활을 오래 해도 그런 감정은 쉽게 무뎌지지는 않는 듯해요. 모른 척하거나 아닌 척 할 뿐이죠."

배우 문근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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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과의 소통에서도 이런 면은 드러난다. 연기에 대한 반응이 잠잠할 때마다 '배역을 제대로 연기하지 못한 것이 아닐까' 고민한다. KBS 드라마 '가을동화' 속 은서와 영화 '어린신부(2004년)' 속 서보은을 연기하면서 얻은 '국민 여동생' 이미지에 대한 부담도 느낀다. "어려 보이는 얼굴을 늙게 할 수는 없잖아요. 성숙한 매력을 보여주고 싶은데, 그게 대중이 보기에 어색할 수도 있어요. 배역에 자연스럽게 스며드는 연기를 하고 싶은데, 생각처럼 쉽지 않아요."

재연은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리는데도 신념을 굽히지 않는다. 그동안 해온 연구가 옳다고 믿으며 집착하고 매달린다. 자신의 가치가 유효하다는 걸 증명하고 싶어 한다. 이 결핍은 또 다른 결핍을 부르고, 욕망 역시 또 다른 욕망을 만들어낸다. 그 끝은 파멸이다. 문근영은 이 점에서 재연과 확연히 다르다. "어떤 역할이든 잘 해내는 배우가 최고라고 생각해왔어요. 그런데 언제부턴가 고스란히 배역에 스며드는 게 불가능해 보이더라고요. 욕심이라는 생각도 들었고요. 그래서 잘 할 수 있는 배역을 더 잘 해야겠다고 다짐했어요. 저만 할 수 있는 걸 열심히 하려고요. 아직 그것이 무엇인지 확신할 수 없지만, 계속 하다보면 알 수 있을 것 같아요. 다른 사람이 보는 나와 내가 보는 나 사이의 접점이요."

영화 '유리정원' 스틸 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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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정원은 그 첫 단추가 될 수 있다. 그녀가 연기를 하면서 오랜만에 재미를 느꼈기 때문이다. "어떤 배역이든 내가 아닌 남이에요. 이해하는 과정이 필요하죠. 적절한 표현을 찾는 시간도 있어야 하고요. 그렇게 재연을 준비하고 연기하면서 그녀가 느꼈을 아픔을 실감할 수 있었어요. 재연에게는 미안하지만, 제게는 즐거운 아픔이었죠. 그래서 이 영화가 제게는 유리정원인 듯해요. 나를 보호해주고 자유롭게 해주는 공간이요. 그 속에서 차근차근 저의 삶을 채워나간다면 지금보다 좋은 배우가 되지 않을까요."





이종길 기자 leemean@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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