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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길의 영화읽기]피해자에서 삶을 증언하는 시민운동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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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석 감독 '아이 캔 스피크'...나옥분의 인생관은 어떻게 능동적으로 바뀌었나

영화 '아이 캔 스피크' 스틸 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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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이종길 기자]"저는 해방되고서도 아주 긴 세월을 제 과거가 부끄러워서, 사람들과 만나는 것을 피해왔습니다. 그러나 저는 용기를 내어 모든 사실을 고백했습니다." 2007년 11월 유럽의회의 일본군 위안부 결의안을 이끌어낸 길원옥 할머니의 연설이다. 그녀는 수요시위에서 만났던 아이들을 떠올렸다. "제게는 큰 숙제가 하나 생겼습니다. '저 아이들만큼은 내가 겪은 것을 다시 겪게 해서는 안 된다'는 간절한 소망입니다." 세상을 함께 만든다는 생각은 역사적 진실에 다가서게 한다. 편견과 독선을 버리고 서로의 아픈 곳을 보듬는 것이 시작이다.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은 말하기 시작했다. 추위와 병환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매주 수요일 12시마다 일본 대사관 앞을 찾는다.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수요시위. 더 이상 피해자에 머물지 않고 당당하게 나와 자신의 삶을 증언한다.

영화 '아이 캔 스피크'는 이러한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자신뿐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해 희망을 외치는 할머니들의 꿈을 나옥분(나문희)을 통해 보여준다. 시장에서 옷을 수선하는 그녀는 '도깨비 할매'로 불린다. 부당한 처사를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다. 구청에 민원 8000건을 넣을 만큼 적극적이다. 김현석 감독은 그녀의 태도가 왜 능동적인 인생관으로 전환했는지를 설명하지 않는다. 미국 하원의회 공개 청문회에서의 증언을 준비하면서 드러나는 위안부 경험으로 짐작하게 할 뿐이다.
영화 '아이 캔 스피크' 스틸 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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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진실이 밝혀지기 전까지 위안부 할머니들은 피해자로서 그늘진 곳만을 찾아다녔다. 1991년 8월14일 김학순 할머니의 공개 증언은 그들을 세상에 나오게 했다. 많은 피해자들이 용기를 내기 시작했고, 이로 인해 위안부 문제가 널리 알려졌다. 일제의 책임을 규명하려는 활동도 많아졌다. 그들은 어느덧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시민운동가가 됐다. 각종 국제회의에서 증언을 하고, 학교나 시민 강좌에서 강단에 오른다. 비슷한 피해를 입은 미군 기지촌의 성매매 피해자들을 찾아가 억울함을 외치라고 격려하기도 한다. 2006년 미국의 한 대학교에서 열린 증언 집회에서 이용수 할머니는 "어디에서 그런 용기가 생겼느냐?"는 여대생의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나는 여기 저와 함께 있는 이 여성들 때문에 이렇게 과거의 아픔을 이기고, 여러분 앞에 당당할 설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제 증언을 경청해주는 여러분의 반응도 저를 당당하게 만들어 줍니다."

나옥분은 인권운동가로 새롭게 태어난 그들 가운데 한 명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주위 사람들에게는 골칫덩어리일 뿐이다. 몇몇 이들은 노골적으로 불만을 표시한다. 전쟁이 끝나고 고향으로 돌아온 위안부 피해자들은 그 시선이 두려웠을 것이다. 남성 중심적이고 가부장적인 논리에서 비롯된 사회의 편견이다. 같은 피해자의 입장이지만 적잖은 이들은 그들을 '빼앗긴 여성'으로 본다. 이 말은 정절을 잃었다는 것과 동일선상에 있다. 이 가치관에서 여성은 때로는 군수 물자, 때로는 증오를 풀어야 할 대상으로 다뤄진다. 윤미향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대표는 저서 '20년간의 수요일'에서 "일본군이 임신한 여성이나 성병에 걸려 효용 가치가 없다고 생각한 여성들을 버린 것이나, 이미 정절을 잃은 여자는 가족으로서나 아내로서 가치를 상실했다고 생각하는 것 모두가 가부장적 관점에서 비롯된 견해"라고 했다. 그러면서 "그동안 가해자의 비인간적이고 성차별적인 가치관에 반대해왔지만, 그것을 받아들이는 우리의 방식 또한 별반 다르지 않았다"고 했다.

영화 '아이 캔 스피크' 스틸 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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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옥분의 고군분투에도 세상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구청 종합민원과에는 여전히 서류가 산더미처럼 쌓여있고, 건설사와 구청은 원칙을 앞세워 시장의 약자들을 압박한다. 나옥분은 서류를 파기하고 원칙을 제공한 박민재(이제훈)에게 간절한 목소리로 부탁한다. "나 마지막으로 한 번만 도와줄 수 없겠냐." 영어를 가르쳐달라는 청이 아니다. 세상의 약자들이 자유롭게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호소다. 그녀는 박민재의 도움으로 별 탈 없이 증언한다. 그 내용은 누군가에게 한정됐던 문제를 우리의 문제로 만들어낸다. 역사적 진실을 넘어 인권으로 써내려가는 미래의 역사다.


이종길 기자 leemean@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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