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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火요일에 읽는 전쟁사]터미네이터가 휘두르던 '개틀링'이 사람 이름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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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영화 '터미네이터2' 장면 캡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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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터미네이터'에서 주인공 아놀드 슈워제네거(Arnold Schwarzenegger)가 사용했던 무기 중 가장 큰 중화기로 나오는 것이 개틀링 건(Gatling Gun)이다. 터미네이터 뿐만 아니라 각종 액션 영화에 등장하는 개틀링 건은 무시무시한 기관총으로 총구가 빙글빙글 돌아가며 사방을 초토화시키면서 영화에서는 주로 강한 남성미의 상징처럼 등장한다.

분당 4000발 이상을 쏴대는 이 강력한 기관포는 육상에서 뿐만 아니라 해상, 공중전 등 곳곳에서 쓰인다. 이 총구가 빙글빙글 돌아가는 기관포를 통틀어서 개틀링이라 부르다보니 이것이 제조사 이름이나 아니면 무기 자체의 이름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있는데 사실 개틀링은 이 무기를 개발한 사람인 리처드 조던 개틀링(Richard Jordan Gatling) 박사의 이름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무시무시한 살인병기를 발명한 개틀링의 직업은 의사였다.
개틀링 건을 비롯해 다양한 농기계를 발명했던 리처드 조던 개틀링 박사(사진=위키피디아)

개틀링 건을 비롯해 다양한 농기계를 발명했던 리처드 조던 개틀링 박사(사진=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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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8년 미국의 노스캐롤라이나주의 머니스넥이란 아주 작은 마을에서 태어난 개틀링 박사는 학교 교사로 있다가 마을에 작은 잡화가게를 냈다. 어려서부터 기계 조립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이앙기(移秧機), 증기 트랙터 등 여러 농기구를 발명했으며 30대엔 천연두에 걸렸다가 살아난 뒤 의사가 되기로 마음먹고 1850년 의사면허도 취득했다.

그 후 1857년에는 증기 경운기를 발명해 특허를 받는 등 발명가로서 활약하던 개틀링 박사는 1861년, 남북전쟁이 발발하자 무기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다. 남북전쟁 당시 주요 전선 중 하나인 인디애나폴리스에 거주 중이던 개틀링 박사는 수많은 부상병들과 시신들이 오고가는 것을 목도한 후, 사람 대신 한번에 많은 화력을 투사시킬 수 있는 무기를 개발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런 무기가 생긴다면 전쟁에 필요한 군인의 수가 줄어들 것이라는 순수한 목표에서였다고 한다.

19세기 당시 사용하던 개틀링 건의 모습(사진=위키피디아)

19세기 당시 사용하던 개틀링 건의 모습(사진=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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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1년 당시까지만 해도 전술은 극히 구식이었고 주로 라이플 소총을 들고 오와 열에 빽빽이 들어선 수백명의 병사들이 하나의 방진을 이뤄 일제사격으로 우열을 가리던 이른바 '라인배틀(Line battle)'이 이어지던 시대였다. 개틀링 박사는 각 군의 한 라인만큼 수천발의 총알을 일시에 내보낼 수 있는 강력한 화력을 지닌 무기가 있다면 그만큼 군인의 수를 줄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고, 이런 궁리 끝에 등장한 것이 바로 이 개틀링 건이었다.
그가 1862년 개틀링 건을 개발한 당시에는 전시였기 때문에 새로운 무기가 바로 채용되기 어려웠고 단지 몇 자루만 채용됐을 뿐이었지만 남북전쟁 이후인 1866년부터는 미 육군의 정식무기로 채택됐다. 당시 이 무기는 분당 600발 정도를 발사할 수 있었으며 1883년 영국인 하이럼 맥심(Hiram S. Maxim)이 개발한 맥심 기관총과 함께 전쟁의 패러다임을 완전히 바꿔버리고 말았다.

기관총, 대인지뢰, 철조망 등 방어를 위한 화기는 크게 증강됐으나 여전히 전쟁교리는 19세기에 머물었던 1차 세계대전 당시 수많은 병사들이 참호 속에서 죽어갔다(사진=위키피디아)

기관총, 대인지뢰, 철조망 등 방어를 위한 화기는 크게 증강됐으나 여전히 전쟁교리는 19세기에 머물었던 1차 세계대전 당시 수많은 병사들이 참호 속에서 죽어갔다(사진=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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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틀링 박사의 의도와는 달리 이 기관총은 전쟁에서 사망자의 숫자를 기하급수적으로 늘려버리고 말았던 것. 서구 열강들에게는 비 서구권 국가와의 재래식 전투에서 완벽한 우세를 안겨주면서 식민지의 무한확장에 발판을 마련해준 무기이기도 했다. 분당 600발씩 날아드는 총알에 병사들은 추풍낙엽처럼 쓰러져갔고 전술개념이 여전히 나폴레옹 전쟁 시대의 라인배틀에 머물러있었던 각국 장교들은 이를 더 많은 병력 충원으로 해결하려고 했다.

이 결과, 19세기 중반까지 공세가 최선이라는 교리에 맞춰져 있던 전쟁교리는 송두리째 흔들리게 됐다. 전시에 선공을 할 경우엔 80% 정도 우세하다는 것이 기존 재래식 병법의 기본이었으나 기관총은 그런 법칙을 싹 다 무시했다. 맨몸으로 돌격하는 병사든 말을 타고 돌진하는 기병이든 기관총 앞에서는 장사가 없었다.

1차 대전 당시 수많은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 한 기관총(사진=위키피디아)

1차 대전 당시 수많은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 한 기관총(사진=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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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전사자 숫자는 상상을 초월하게 됐다. 전체 사상자는 3000만명에 이르렀고 주요 전장이 된 프랑스에서는 이후 2차 세계대전까지 대부분 아이들이 아버지의 얼굴을 모르고 자랄 정도로 성인남성 대부분이 전사했다. 참전을 명예로 여기고 자신의 말을 끌고 기병대로 참전했던 귀족들은 거의 다 죽었다. 유럽에서 중세시대 이후 천년 가까이 내려오던 왕정 및 귀족정이 완전히 붕괴하고 시민사회를 출현시킨 것도 기관총이 불러온 대살육 때문이었다.

1906년까지 생존한 개틀링 박사는 1차 세계대전의 참혹함은 보지 못하고 죽었지만 생전에도 자신의 총이 더 많은 사람들을 죽게 하는 것에 가슴 아파 했다고 한다. 그래서 더욱 강력한 무기를 생전에 만들었는데 전기모터를 장착한 오늘날 발칸포의 전신인 개량형 개틀링 건으로 무려 분당 3000발을 발사하는 무기였다. 개틀링 박사는 더욱 강력한 무기로 전쟁을 더욱 참혹하게 만들면 전쟁이 줄어들 것이라고 믿었지만 현실은 이와 정 반대로 흘러갔다.

그러나 보다 강력한 무기가 평화를 가져올 것이란 개념은 이후에도 수많은 과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국가 간 대규모 전면전을 상상조차 할 수 없도록 쌍방의 완전한 파멸을 보증하는 무기에 대한 과학자들의 도전은 결국 핵무기란 괴물을 만들었으며 2차 대전 이후 냉전이라는 새로운 국제질서도 낳게 됐다.



이현우 기자 knos84@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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