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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길의 영화읽기]예술이라 쓰고 최면술로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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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흐센 마흐말바프 감독의 '어느 독재자'

영화 '어느 독재자' 스틸 컷

영화 '어느 독재자' 스틸 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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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이종길 기자]"폐하, 너무 힘들고 졸려요. 궁전에는 언제 갈 수 있는 거죠?" "여기가 우리의 새 궁전이란다." 말 한 마디로 도시의 불을 껐다 켜는 대통령(미하일 고미아쉬빌리)과 손자(다치 오르벨라쉬빌리). 하루 만에 도망자 신세다. 헝클어진 머리카락과 수염, 게다가 더럽고 후줄근한 누더기 옷을 걸치고 있어서 영락없이 거지다. 칠흑 같은 축사에서 대통령은 애써 담담하게 불을 피운다. 손자는 초조하고 불안한 마음을 숨기지 못한다. 대통령은 기타를 집어 든다. "내가 연주할 테니 춤을 추거라." 느릿느릿 튕기는 기타 줄에서 처량하고 무력한 가락이 흘러나온다. 타즈다 주나이드의 '다스탄(DASTAAN).' 눈물이 왈칵 쏟아져도 이상하지 않을 노래에 손자는 왈츠를 춘다. 여자 파트너를 안 듯 두 손을 앞으로 뻗더니 이내 한 바퀴 빙그르르 돈다. 그에게 춤은 즐거운 기억이다. 머릿속에서 다른 음악이 흐른다. 고탄 프로젝트의 '라 글로리아(La Gloria).' 아르헨티나 탱고와 일렉트로닉 음악이 어우러져 정열적인 꽃잎을 피운다. 궁전에서 마리아와 왈츠를 추며 놀던 행복한 기억이다.

영화 '어느 독재자' 스틸 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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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흐센 마흐말바프 감독(60ㆍ이란)의 영화 '어느 독재자'는 부귀영화를 누리던 대통령이 권력을 잃고 손자와 함께 도피하는 이야기다. 위험천만한 여정에서 자신이 저지른 만행의 실체를 목도한다. 막노동하는 코흘리개 아이들과 고문 피해자들, 매춘부, 가난한 이발사. 가뜩이나 피폐했던 삶이 대통령의 공백과 함께 찾아온 거대한 혼란에 전복된다. 법도 윤리도 사라진 세상은 또 다른 독재치하를 예고한다. 독재자가 쫓겨났지만, 여전히 누군가가 행진곡을 틀며 충성을 요구한다. 가장 먼저 반응하는 사람은 대통령의 손자다. 궁전에서 배운 대로 음악에 맞춰 거수경례해 정체가 발각될 위기에 놓인다.
순수한 예술도 독재치하에서는 대중통제의 최면술로 전락한다. 역사적으로 많은 독재자들은 음악을 통해 대중의 생각과 행동을 획일화하는 한편 집단적 정체성에 강한 에너지를 부여했다. 이 의식은 종교적 성격을 보이기도 한다. 쥬타 브뤼크너 감독(76ㆍ독일)의 '히틀러 칸타타(2005년)'에서 우르줄라 슈너(레나 라우제미스)는 히틀러 유겐트 세대의 작곡가 지망생이다. 히틀러가 시가를 행진할 때 나치 군인들의 경비를 뚫고 도로에 뛰어든다. 히틀러를 향해 뛰어가며 "나의 총통"이라고 외친다. 히틀러와 눈이 마주친 그녀는 종이 뭉치를 내민다. "총통이여, 이 음악은 당신을 위한 것이에요." 우르줄라는 벅차오르는 감동을 주체하지 못한 나머지 그대로 쓰러진다.

영화 '어느 독재자' 스틸 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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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틀러는 표면적으로 예술의 자율성을 추구하며 제국민족계몽선전부처, 제국문화부 등을 세웠지만 다양한 방법으로 예술 활동을 통제하거나 장려했다. 나폴레옹은 집권과 동시에 파리오페라단을 대폭 재정비했지만 이 작업을 내무부에 맡겼다. 1806년 6월 8일 관련 법령에 '오페라의 주제는 주인공들이 신이거나 왕이거나 영웅인 신화 또는 역사적 사건에서 끌어온 것이어야 한다'라고 명시했다. 수많은 전투에서 승리한 그에게 열광한 파리 청중들이 작품 속 영웅과 나폴레옹을 동일시하도록 만들기는 그리 어렵지 않았으리라. 스탈린은 민속음악을 적극 활용했다. 1937년 발표된 '스탈린의 영광이여, 영원하라'가 대표적이다.

영화 '어느 독재자' 스틸 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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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의 개인적인 음악 애호와 포용적 문화정책은 장기집권에 크게 기여했다. 영화 독재자에 나오는 대통령도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마흐말바프 감독은 첫 장면에서 오색찬란한 빛으로 물든 도시의 야경을 배경으로 국영라디오방송을 들려준다. "하늘에서는 신께서, 땅에서는 대통령께서 국민의 행복을 살피십니다. 거리가 어찌 이렇게 밝습니까? 지금이 밤 8시라고 누가 믿겠습니까?" 이어 흘러나오는 왈츠 '푸른 도나우 강.' 요한 슈트라우스 2세가 1866년 프로이센과의 전쟁에서 패한 오스트리아의 국민을 위로하기 위해 만든 곡이다. 영화 속 나라의 국민도 한때 이 아름다운 선율을 위안으로 삼았을 것이다.




이종길 기자 leemean@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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