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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동여담] 108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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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류정민 차장] 2014년 6월12일 순천의 한 '매실 밭'에서 변사체가 발견됐다. 막걸리 빈 병 1개, 육포 2봉지, 콩 20알, 스콸렌 빈 병…. 그의 소지품은 예사롭지 않았다.

경찰은 변사체의 신원을 파악하기 어려웠다. 시신의 부패가 진행되면서 사실상 백골 상태로 변해버린 탓이다.
수사당국은 변사체의 주인공을 노숙자로 판단했고, 단순 변사사건으로 처리했다. 당시만 해도 이러한 판단이 어떤 후폭풍을 몰고 올지 상상하지 못했다.

매실 밭 변사체 발견 이후 40일이 지난 7월22일 전국이 발칵 뒤집혔다. 노숙자인 줄로만 알았던 변사체 주인공은 당시 수사당국이 눈에 불을 켜고 찾아다녔던 유병언 전 세모그룹 회장으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이미 세상을 떠난 인물을 찾겠다고 하루 평균 3만명의 경찰이 투입된 초대형 작전. '유령' 검거 대작전은 그 자체로 촌극(寸劇)이었다.
세월호를 실은 반잠수식 선박 ‘화이트마린호’가 31일 오후 1시 침몰 1080일 만에 전남 목포신항 철재부두에 도착하고 있다.

세월호를 실은 반잠수식 선박 ‘화이트마린호’가 31일 오후 1시 침몰 1080일 만에 전남 목포신항 철재부두에 도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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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병언만 찾으면 세월호의 비밀이 드러날 것처럼 분위기를 몰아갔지만, 현실은 달랐다. 유병언 일가와 그의 주변 인물을 시쳇말로 탈탈 털었지만, 세월호를 둘러싼 근본 의문은 3년이 흐른 지금까지 해소되지 않았다.

'유병언 찾기 대작전'은 여론의 눈과 귀를 집중시키는 데 성공했을 뿐이다. 드라마틱한 사건 전개 때문이었는지는 모르지만, 수많은 사람이 그 황당 스토리에 관심을 집중했다. 2014년 여름을 달군 '잿빛 드라마', 여론의 시선이 기괴한 스토리에 꽂혀 있는 동안 세월호의 진실은 점점 더 관심 대상에서 멀어졌다.

왜 사랑하는 가족이 그렇게 세상을 떠날 수밖에 없었는지, 그 이유를 알고자 했던 세월호 유가족에게 그해 여름은 견디기 힘든 시간이었다. 가족을 잃은 아픔보다 더 그들을 힘겹게 한 것은 사회의 냉소와 무관심이었다.

유병언 전 회장이 숨진 것으로 발표된 이후에도 여론의 시선은 곁가지로 향했다. "유병언이 살아 있을지도 모른다던데." "멀쩡했던 사람이 어떻게 백골 시체로 발견될 수 있겠어?" "이미 밀항에 성공해 한국 상황을 전해 듣고 있다던데…."

합리적 의심과 그럴듯한 소설 등이 꼬리를 물면서 후속 시나리오를 이어갔다. 그렇게 잿빛 드라마에 푹 빠져 세월호 진실 찾기의 '골든타임'을 흘려보냈다.

잠시만 기다리면 구조대가 도착할 것으로 철석같이 믿었던 아이들이 어둡고 차가운 바다에 가라앉는 동안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지켜봐야 했던 이 땅의 어른들은 다시 아이들을 외면한 셈이다.

처참했던 2014년 봄날의 기억을 뒤로 한 채 특별한 봄을 맞이했다. 세상과 단절된 시간을 보내야 했던 진도 앞바다의 세월호가 깨어났다. 2016년 3월31일, 1080일의 기다림 끝에 세월호는 다시 뭍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진실의 실타래를 푸는 작업은 이제 시작이다. 세월호 선체를 육지에 무사히 거치하는 것부터 미수습자 수색 작업, 세월호 침몰 원인 정밀 조사 등 과제는 산적해 있다.

그 과정에서 국민의 눈과 귀를 현혹하는 또 다른 잿빛 드라마가 등장할지도 모른다. 세월호 진실이 가려지기를 바라는 이들의 작전에 다시 여론이 흔들릴 수도 있다. 1080일의 기다림 끝에 고개 하나를 넘었지만, '진실인양'까지는 여전히 넘어야 할 산이 많다는 얘기다.




류정민 산업부 차장 jmryu@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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